[엔닝] 짐승의 흔적 (완결) -수정본- <흔적 - 프롤로그> 1. 나 유기연은 열 일곱 되던 해에 윤은협을 처음 만났다. “야, 거기 예쁘장하게 생긴 놈!!! 너, 담배 가진 거 있냐?” 은협은 모든 사람들이 다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내게 물었다. 그것도 교복 넥타이가 바람에 휘날리는 그 장소에서!! 문제는 그곳이 선생들이고 학생들이고 모두가 볼만한 장소라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담배를 피면, 어른들은 기가 차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단 선배들에게 먼저 죽는다. 고만한 나이의 우리들에겐 선생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선배들이었다. 그런데도 은협은 그 잘생긴 얼굴로 아이처럼 해맑게 미소지으며 나에게 말한 것이다. “담배 한 대만 빌리자, 친구-!” 그렇게 내 인생은 꼬였다. 나는 윤은협의 그 얼토당토 않은 사고회로, 그리고 어린애처럼 단순한 그 결과들에 일종에 책임의식까지 느끼며 나이 들어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반한 것이 죄라고- 그 녀석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은 모두에게 늪이기도 했고,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녀석이 뭔가를 원하고 가끔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든 해결해주는 보호자같은 비서였다. ..그러나 그 녀석에게 나는 단순한 친구였다. 그 녀석은 내 안에 이렇게 시커먼 사내가 숨어있다는 것을 전혀 모를 뿐인 10살밖이 어린아이와 같았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했고, 해 맑았고, 그리고 이기적인 윤은협. 한마디로 내 인생은 완전히 꼬였다. 2. 윤은협은 한마디로 대책없는 인간이었다. 녀석은 언제나 반쯤 호기심과 흥미로 곧잘 사고를 쳤고, 그 때마다 나는 녀석의 사고를 수습하기에 바빴다. 잦은 여자문제부터 해서, 교내 싸움 문제, 성적 문제 등등. 그러나 은협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일단, 사심없이 나를 믿고 좋아하는 그 순수함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덩치도 크고 강아지 눈망울 같이 초롱 초롱한 녀석은 늘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으며 내게 말했다. “아아...여자친구가 또 임신을...........” 나는 항상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뇌했지만, 역시 내가 반했던 게 죄였다. 보상받지 못할 감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들은 묘한 끈으로 묶여 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가족이었다. 나는 열일곱에 부모님을 잃고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철없이 덩치만 큰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은 그 학교에서 가족이 없는 몇 안되는 사춘기 녀석들 중 둘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야 한다..라는 묘한 의식은, 녀석에게는 우정으로, 그리고 내게는 애정으로 다가왔다. 어느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우리들은 각자의 부모님 산소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정좌를 한 채, 교복 셔츠를 말아올리고 지혈을 하듯 팔꿈치 아랫부분을 천으로 단단히 동여메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철없는 치기. 그런 의리에 혹하기 마련인 그 시절의 허세 정도로 우리는 사고를 쳤다. 언제나 이성적인 내 쪽에서 녀석의 그 장난같은 제안에 어느 정도 찬성 한 것은, 바로 피를 섞는다는 묘한 자극 때문이었다. “엄마........ ...내 가족이야.“ ..라고 녀석이 먼저 산소를 향해 말했다. 떠나고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왼손에 가볍게 십자를 그어 피를 약간 흘린 채 서로 섞이게 만들었다. 빗물 때문에 잠시 희석될 수도 있었지만, 그 농도 짙은 점액질은 그 날 이후 내내 나에게 남겨졌다. 녀석과 나는 의형제라는 기분 좋은 미명 아래, 빗줄기 속에서 처음으로 마음놓고 부둥켜 안은 채 울었다. 잃어버린 가족 대신으로 우리는 서로를 찾았다. 나는 믿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왼손에 서로 십자 무늬가 남겨져 있는 한, 우리가 계속 된다는 것을. 3. 언제나 사고 잦을 날 없는 윤은협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길들여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할만큼 싸우고, 주로 내가 그를 혼냈다. 그러나 녀석은 혼이 날 때도 항상 ‘하하하’거리며 바보같이 웃었다. 착한 녀석이었다. 너무 착해서 녀석은 바보 같았다. 한 두가지 이외에는 타인의 감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아이들은 순수하지만, 때론 이기적이다. 자신과 몇몇 소중한 것 외에 다른 것들까지 폭 넓게 사랑할만큼 시야가 넓지 못할 때도 종종 있다. 바로 윤은협이 그랬다. 나는 열 아홉 때, 그런 윤은협의 사고 뭉치 인생 때문에 이미 한번 인생이 꼬였다. “기연아, 어쩌지? 나...“ “뭐?” 교복 넥타이 매듭을 초조하게 풀며, 녀석이 다급하게 외쳤다. “나,..이번에는 정말 조직 여자를 건드렸어!!...” 씨바-!!!! 여기는 막다른 골목길이잖아, 이 새꺄!!!! 그러면 이 쪽으로 숨어 들면 어떻게 해!!!!!!!!!!!! 그 때 처음으로 나는 내가 은협에게 빠져 든 것에 좌절했다. 미칠 일이었다. 물론 숭고한 내 마음까지 알아주길 원한 건 절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자들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손에 댈지 몰랐다. 아니, 여자건 남자건 소용없었다. 이 열혈 청년은 얼굴만 이쁘고 성격만 온순하면 밑도 끝도 없이 수작을 걸었다. 나는 사실 그런 녀석의 철없는 애정갈구에 조금 성격을 죽여볼까..생각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그리고 녀석 또한 나를 연애대상으로 보기에는 이미 너무 친밀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나는 녀석을 안고 싶었지 안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녀석이 나보다 덩치가 커지면서 좌절하기 시작했지만. 아무튼 그 날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감히 조직 폭력배의 연인을 건드렸다는 겁 없는 말 뒤로, 이미 다른 녀석들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우리집 앞 골목길로 뛰어드는 적어도 다섯 명의 녀석들. 정신없이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아..늘 이런 식이다. 허나 문제는 이 싸움이 단순한 동네 녀석들의 싸움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한번도 싸우는 일에 역부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은협과 더불어 지칠 정도로 한계를 느꼈다. 퍽- 하고 누군가 강렬하게 허리 쪽을 때렸다. 욱씬-거리는 굉장한 통증이 촤르륵 온 몸에 흐른다. 잠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고통이었다. 이어서 그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신입!!! 이 초삐리 같은 새꺄!!!! 넌 왜 가만히 있어!!!!!!!!!!!!“ 달려온 것은 분명 다섯명인데, 고통 때문에 흐릿한 내 시선으로 보기에도 누군가 한명은 정지해 있다. 네명만이 우리를 에워싸고 공격했던 것이다. 나는 그나마 그 한 녀석이라도 안 덤벼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마찬가지로 잘 싸우는 은협도 이미 반쯤은 얻어터졌다. 초 날라리 근성 때문에, 은색으로 염색한 녀석의 머리카락에 조금 핏기가 물들어 있었다. 그 때, 퍽-하고 다시 내 등뒤와 내 몸에서 동시에 소리가 들렸다. 비겁하게 자신들보다 어린 우리 고등학생들에게 쌍으로 공격하는 형님들이다. “우웃..................” 아픈 통증으로,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풀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등 뒤로 은협이 얻어터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죽는 거 아닌가..하는 아찔함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들 중 하나가 쓰러지는 내게 칼을 내들었다. “........-!!!!!!!!!!!” 나는 죽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마저 느꼈다. “........넌 또 뭐야.” 그러나 곧 나를 향해 그 날카로운 단도를 휘두를 것 같던 깍두기 형님. 그들 중 하나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멈췄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가물거리는 시선으로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 때, 골목길 입구 쪽에 누군가 지나가다가 멈춰 선 것이 보였다. 난데없는 타인의 등장에 조직 녀석들은 주먹질을 멈추고 잠시 소리를 빽 지른다. 아마 언뜻 쓰러지기 전에, 그 등장한 놈에게 교복같은 것을 보았던 것 같다. 나는 설마 그 녀석이 우리를 도와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인생에서 누군가 자신의 삶을 구해주리라고 믿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럴 만한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윤은협 이 개자식 하나만으로도 벅찼다. 그 녀석이 나를 구원처럼 여기며 허허거리는 바보짓에도 바빴던 것이다. 나는 윤은협에게 내가 기댈 수 있는 종자라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다. 다른 누군가는 필요 없었다. 싸가지 없을 정도로 나는 냉정했다. 그날까지도 그 생각에는 별로 변화가 없었다. 그저 앞으로 쓰러진 채, 이마가 터져서 흐르는 비릿한 피냄새에 살짝 전율했다. 항상 냉랭하고 차가운 나를 유일하게 흥분시키는 그 무엇- 바로 그 때였다. 의례히 이 상황을 무시할 거라 믿었던 그 녀석이 갑자기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 천천히- 아마 내 눈이 그렇게 서서히 감겼기 때문에, 녀석이 들어서는 동작은 아주 서서히 느껴졌다. 영화 속의 슬로우모션처럼 묘한 기분이었다. “............-!!!!!!!!!!!!” 믿을 수 없다!!! 그 얼굴도 모를 녀석은 우리를 도와주었다!!! 아니, 무엇 때문인지 이유는 전혀 모르지만 녀석은 날카로운 주먹을 날려 조직의 개들과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한참 투닥거리고 퍽벅거리는 엄청난 소리들이 멍한 내 뇌리에서 이어진다. 하늘이 까맣게 물든 저녁이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를 도와주는 그 녀석을 제대로 구별할 수도 없었다. 그저 검은 짐승들이 엉켜서 마구 싸웠다. 그리고 검은 먹구름 사이로 까마귀같은 비가 내렸다. 아아..지랄같이 비가 내렸다. 그리고 너무나 지루할 정도로 그 싸움은 계속되었다. 거친 숨소리, 온통 뒤엉키는 검은 날의 회상. 얼마나 지났을까. 거의 마지막에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녀석들과 맞섰을 때, 그들 중 하나가 그렇게 소리쳤다. “야, 가자. 안되겠다.” “그러게..씨바... ...무슨 고삐리들이 이렇게 쌈박질을 하냐...씨발새끼들.. 아주 싹수가 노랐다, 노래!!“ 가려면 알아서 갈 것이지, 뭐하러 끝까지 사람을 야루며 사라진단 말인가. 나는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밀어올리며 안간힘을 썼다. 골목길 바깥쪽으로 흐느적 거리며 사라지는 다섯명의 깍두기들이 보인다. 투두두둑-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침내 털썩- 주저앉았다. 비가 와서 다행히도 핏자국은 배여들지 않고, 다만 여기 저기 얻어맞고 찢어진 곳만 쓰라렸다. 은협은 이미 쓰러져 있었다. 우리 둘다 너무나 흠씬 맞았던 것이다. 또한 우리 둘 말고도, 그나마 그 와중에 도와주려 뛰어 든 녀석도 꽤 많이 맞은 것 같았다. 그러나 캄캄해진 공간과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린 나는 그를 확인하지 못했다. 미안하게도, 나에게는 은협이 먼저였다. “...야...” 낮고 갈라진 음성으로 은협을 부르며 돌아서자, 녀석이 움틀거린다. 일어나..이 새꺄...라고 말하며 나는 힘이 빠진 채 녀석을 흔들었다. 그 때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녹초가 되어 있을 줄 알았던 다른 한 녀석이 갑자기 손을 높이 들었다. 무슨 짓을 하는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지 모른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 것이다. 바로.... “아악...-!!!!!!” 소리같은 건 잘 내지 않는 나도 깜짝 놀라는 바람에 조금 높게 고함을 질렀다. 녀석이 손을 번쩍 드는 순간, 번개에 맞은 것처럼 뭔가 허공에서 커다랗게 빛을 반사했고 동시에 나는 오른 손에 강하고 짜릿한 아픔을 느꼈다. “.........-!!!!!!!!!” 그리고 녀석의 얼굴을 분노에 가득 차 확인하려는 사이, 녀석은 아무 말없이 뒤로 물러섰다. 손등을 내려다보니, 오른 손에 마치 들짐승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자국이 쓰윽 나 있었다.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피 냄새가 비릿하게 밀려왔다. “...........뭐야.” 왜 느닷없이 공격하는거지.. 아니, 그렇다면 왜 도와준 거지..라고 혼란이 순간적으로 든다. 그러나, 내게 그림자처럼 빛을 등지고 서서 온통 시커멓게 보이는 상대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조용히 멀어졌다. “유기연.” “.........너, 뭐야.” “...그 상처는 내 것이다.” 그리고 충격에 휩싸인 우리를 남긴 채 멀어졌다. 쫓아가서 죽여 놓고 싶었지만, 그 쯤에 정신이 들기 시작한 은협 때문에 차마 그러지 않았다. 또한 상처도 그리 깊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주 절망적이고 한계를 느낀 그 순간에 그래도 불현듯 도와주었고 나타나준 그 묘한 존재에 대한 안도감이 있었다. 그 날의 야릇한 피 비린내. 별로 깊지 않은 상처였지만, 내 평생을 따라다닌 상처. 손등에 나 버린 이상한 발톱같은 상처. 그 이후로, 나에게는 묘한 버릇이 생겼다. 바로 초조하고 긴장할 때마다 그 손등의 상처를 입술에 대는 습관이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반드시 그 날의 공격받던 두근거림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항상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인형처럼 감정없이 숨을 죽이고 살아왔다. 그러나 숨죽여 그 상처를 핥는 순간만은, 기묘하게 가슴이 울컥거렸다. 그것은 갑자기 묘한 열기에 숨이 막하게 만들었다. 흡사 그 날의 비냄새와 피비릿내가 합쳐져서 머리 속을 쿵-쿵-쿵- 울리는 듯한 묘한 본능. 험악하고 잔인한 들짐승의 발톱자국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 흔적. 내 오른 손에는 그렇게 짐승의 자국이, 그리고 왼손에는 내 정처없는 사랑의 낙인이 서로 남겨졌다. 바로 열 아홉에, 나는 양 쪽 손등에 둘 다 상처를 남겼다. 다만, 짐승의 흔적. 그것을 누가 남겼는지 알지 못했다. 돌이켜 몇 번이나 생각해도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없었다. 워낙 어두웠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7년이 넘도록, 이 진득한 상처의 주인공 맹수. 그 실체를 모른다는 것이 답답해 왔다. <흔적. 1> 1. 내 이름은 유기연. 나이 스물 일곱. 하는 일, 외부 비서로 프리랜서 일을 하며 이따금 친구 윤은협의 사무실 일을 돌봐주는 것- 한 낮의 더위가 찌는 듯 했다. 셔츠 밖으로 땀이 밀려 나올 것 같이 등이 따가웠다.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느긋하게 계단을 내려가며 녀석의 전화를 받았다. - 어떻게 하지, 기연아...- 또 윤은협이다. 보나마나, 자신이 저지른 여러 가지 사고 중에 하나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녀석은 참 여러 가지로 사고를 쳤다. 그 호감가는 얼굴, 그리고 천성적으로 절대 어쩔 수 없는 착해빠진 이기심. 그런 것들을 무기로 사람들은 녀석에게 마구 빠져들었다. 투자자들은 투자했고, 정치가들은 빽을 써줬으며, 하다 안되면 각종 로비에 뒷돈까지.. 나는 적당히 말렸지만, 윤은협이 그런 일에 ‘적당하다’라고 넘어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녀석은 승승장구 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몇 년 전에는 자신과 관계를 맺은 정치가를 이용해서 심지어 주가조작까지 들어갔다. 언젠가는 큰 코 다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봐 주고 있었다. 녀석이 뿌리는 재앙의 씨앗이 너무 커지지만 않을 정도로 조율해주는 역할이었다. 녀석에게는 제어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것만 조금 잡아주면 그 다음은 그래도 괜찮다. 나는, 알고 있었다. 사고를 치면, 녀석은 항상 나에게 달려온다. 그리고 매달리듯 덤벼들며 순수가 빛나는 그 유혹적인 눈동자로 간절하게 빌어대는 것이다. 도와줘, 제발. 난 너 없으면 안되는 거 알잖아..라고. 그것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까지만- 그 날, 나는 지하철을 타면서 은협의 다급한 전화를 받을 때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데?” 나지막하고 침착하게 묻자, 녀석은 조금 진정된 듯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아.. 사채업자들이 찾아왔어. 늘 돈을 빌렸는데.. 이번에는 유난히 오래 사무실에서 버틴다구...- 그래서?..라고 차갑게 말하며 나는 녀석에게 들리지 않게 웃었다. 바로 그런 거다, 윤은협. 사고 치더라도 다 용서해줄테니 제대로 사고쳐라. ..그래야 언젠가는 나에게 정말 벗어나지 못하지....라고. 나는 몰랐던 것이다. 그 일이 얼마나 내게도 중대한 사건이 될 것인지. 2. 원래, 거래하는 다른 회사로 가려고 했는데, 나는 내가 등록된 컨설팅 회사에 적당히 전화하고 행선지를 옮겼다. 녀석이 와 달라고 할 때 바로 가 주는 경우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사채업자’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여느 소액 투자자들이거나 그냥 협박하려는 놈들이 아닌 것 같았다. ‘몇번이나 돈을 빌렸는데..’라고 말한 부분도 왠지 덜컹-하고 심장이 뛰었다. 그 직감은 별로 틀린 적이 없으므로, 나는 조금 정색을 하고 녀석의 사무실로 향했다. 물론, 들어서기 전에 살짝- 십년 가까이 된 이 습관처럼 손등의 발톱 모양의 상처를 혀로 핥았다. 3. 그리고 깨달았다. 아아....나는 잘못 들어온 것이다! 갑자기 돌아보니, 사무실 안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굉장히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저기..........” 나는 가뜩이나 눈에 힘을 주고 있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지..씨바.. 다만, 눈에 콩깍지가 쓰인 내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했을 뿐- “저는 여기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은협의 사무실에 볼일 차 들어왔을 때, 이미 출입구는 봉쇄 당했다. 이들이 사채업자들인가 아니면 그냥 단순한 정치 깡패들인가를 고민하는 사이, 그들은 나를 사무실 안으로 밀어 넣고 문 앞을 든든히 지켜 버린 것이다. 오후 낮 3시. 찌는 듯한 더위 때문에 간신히 숨 쉬고 있었던 나는, 땀을 훔치며 심한 긴장감으로 목이 타 오른다. 문제의 핵심인 윤은협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 목청이 터져라 고함치던 이 덩치 큰 녀석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사무실 직원들과 은협의 수하들은 저마다 조금 더위에 지친 상태로 나를 쳐다본다. 그들로써도 이 일과 아무런 상관없는 내가 감금된 것에 놀란 것이다. 윤은협은 바보다. 그러나 그들 사무실 직원들은 바보 사장을 그래도 좋아했다. 당연하다. 녀석을 싫어할 만큼 악한 심장을 가진 녀석은 거의 없었다. 은색으로 염색한 은발의 머리, 윤은협. 게다가 친절하기도 하고 성격도 호탕한데다가 맑고 순수했다. 한마디로 바보였기 때문에 절대 앞 뒤를 가리지 않았다. ........나는 세월이 흐를수록 내 손등에 남은 십자의 상처만큼 녀석을 좋아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늘 이런 상황에 봉착하는 사무실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우리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윤은협이 당연히 싫은 깍두기들은 아주 차가운 표정으로 버티고 있다. 그 와중에 검은 선그라스를 낀, 그다지 덩치가 크지 않고 키가 크며 멋진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내가 얼굴도 모르는 이 깍두기들의 존재...은협의 말로는 분명 ‘사채업자’라고 말한 그들. 그러나 이렇게까지 버티는 이유는 모르겠다. 영문을 모른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가만히 입 다무는 게 최선이다.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뭐든 기다리는 일에는 익숙했다. 그렇게 한 시간 쯤 흘렀을까, 숨막히는 긴장감 끝에 조직 녀석들 중에 하나가 썬글라스를 낀 누군가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가장 대장으로 보이던 녀석이 벌떡 손님용 의자에서 일어선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짙은 안경을 쓴 채 검은 양복을 입고 들어선 것이다. “오셨습니까.” 오라.. 그러니깐, 지금 들어선 녀석이 아무래도 진짜 대빵인 것 같았다. 나도 , 그리고 사무실 직원들도 앉아 있는 자리에서 잠시 뒤척인다. 은협은 아무래도 나타나지 않고, 이제 바야흐로 그들이 물러설 것인지 더 죄여올 것인지는 이 우두머리의 선택인 것이다. 꿀꺽- 나는 저절로 마른 침을 삼키며 들어온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내는 검은 안경을 쓰긴 했지만, 단정하고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그렇다고 여자처럼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지나치게 잘생긴 이목구비였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고 모두가 앉아 있는 사무실 안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덫에 걸린 사냥감을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은협의 사무실 사람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윽고 관찰을 다 끝낸 남자가 손가락으로 턱을 가볍게 문지르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의 태도는 지나치게 차갑고 냉정해 보였지만,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그 검은 안경 속에 가려져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실장님.”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옆자리에 서 있는 다른 남자를 부른다. 한눈에 보아도 지적으로 보이는 강실장이라는 사내는 가볍게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마치 귀를 쫑긋하는 심정이 된 것은 그 사무실의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이 일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나 자신도 말이다. 한참을 뭐라고 귀엣말로 속삭이던 그가 갑자기 씽긋- 썬그라스 아래로 웃으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사람.” “.........-!!!!!!!!!!” 그는 그렇게 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설마..농담이겠지..라고 생각하며 나는 마른 입술을 살짝 축인다. 그러나 검은 선글라스의 잘생긴 사내는 하얀 치아가 보이도록 깨끗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다시 가리켰다. “저 분을 모셔오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끝- 나는 주변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측은한 눈길과, 어느새 우르르 옆으로 다가온 깍두기들이 나를 에워싸는 풍경에 압도당한 나머지 숨만 가볍게 헐떡거린다. “아, 저는 아닙니다!!!!“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었다. 누군가가 내 목 뒤를 가볍게 탁 손등으로 치자, 갑자기 억-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몸이 고꾸라진 것이다. 눈 앞이 갑자기 뿌옇게 물들었다. 윤은혀업-!!! 내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이 빌어먹을 새끼!!!!!!!!!!!!!! 4. 갑자기 질식할 것 같은 기분에 숨을 멈췄고, 또한 머리 속이 시원해지는 차가운 기분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한동안은 정신이 들고도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침침한 눈길로 앞을 이리저리 쏘아보자 그 때서야 눈에 초점이 잡힌다. 나는 누군가 내 안경을 벗겨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가 어딥니까...” 침착하자, 유기연. 침착하자...평상시처럼 냉정을 되찾자... 속으로 몇 번이나 되아리며 눈을 깜박인다. 그다지 어둡지 않은 방 안은 고급 내실같은 분위기였다. 일단 그다지 주눅들만한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긴장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나는 일단 내 처지부터 점검했다.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팔은 묶여있었다. 그리고 이 주점의 고급 내실같은 장소 안에는 아까 사무실에서 보았던 장정들이 서너명 둘러 서 있었다. 검은 선그라스의 사내가 ‘강실장’이라고 부른 사내도 내 옆에 서 있었다. 일단, 그들 중에 아무도 그다지 위협적인 표정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간신히 마른 입을 열어 그들에게 부탁한다. “이봐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은협이네 회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그러자 기절한 내게 물을 끼얹었던 괘씸한 강실장이 조금 옆으로 물러섰다. 아마 내가 제대로 깨어났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헉’하고 숨을 들이쉰다. 강실장의 뒤에는 아까 낮에 등장했던 그들의 대빵, 검은 선그라스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미소짓는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기분이 그다지 좋진 않았지만,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린다. 마치 이곳에 잡혀온 포로가 된 느낌으로 영 석연치 않았던 것이다. 한참을 기다렸다. 마침내 선글라스의 사내는 안경을 벗으며 내게 인사할 때까지. 그는 천천히 맨 얼굴을 드러내며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입을 연다. “안녕하셨어요, 선배님.” “.............-!!!!!!!!!!”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인 끝에 그가 누군지 겨우 알아보았다. 녀석은 나와 윤은협이 나온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한 학년 후배- 바로 ‘강서준’이었다. 5.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깨달았는데,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은협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서준이 지금도 딱히 그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들 세 사람은 서로 적대시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 때 은협이 사귀었던 여자의 동생이었다. 그런데 9년이나 흘러서 다시 이런 상황으로 만나야 하다니!!!! 나는 뜨금할 정도로 속이 탔는데, 손이 묶여 있는 곳에서는 식은땀이 간간히 배어나왔다. “저기, 강서준!!.. 나는 은협이네 회사랑 아무 상관이 없어... 니가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하려 애썼다. 비교적 정확하게 내 뜻을 전달한 거라 믿었다. 그러나 녀석은 조금 생각하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다른 녀석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달라고 부탁한다. “선배님.”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나 알자. 이게 뭐야.“ 녀석과 나는 고등학교 졸업이후 몇 년동안 서로 격조하며 지내왔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나 이 대낮의 납치극이라니. 도대체 은협과 서준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알아야겠다. 과거, 우리들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일 말고....지금 내가 모르는 은협과 이 녀석 사이의 일!!! 그래야지 속이라도 시원하지. “너, 이러는 거 법에 위배된다.” 답답한 어조로 조금 언성을 높이자, 녀석이 나에게 물컵을 내민다. 순간적으로 손을 내밀 뻔 했다. 비록 묶여 있었기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일단, 드세요.” 그는 마치 아량좋은 사람이 그렇듯,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고개를 젖힐 때 물을 붓는다. 꼴 한번 좋군..이게 무슨 날벼락인가..라고 고민하며 나는 그러나 잠자코 받아마셨다. 어쨌든, 고등학교 때부터 날고 기는 녀석으로 가희 은협과 맞장을 뜰 녀석이었는데, 졸업하고 나서 진로가 이렇게 정해졌나보다. 녀석과 은협에 대한 여러 가지 과거들이 떠올랐다. 나는 서준과 그다지 친하진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 딱 한번 만났다. 바로 은협의 차 버린 여자친구, 서준의 누나에 대한 일 때문에 몹시 껄끄러운 사이로 만났었다. 그러나 스물 일곱이 되어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발생할지는 꿈에도 몰랐다. 역시 우리는 은협 때문에 만났다. 달라진 것은 없다. 서준은 십여년 전의 그날들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조용히 상황을 설명한다. “강은협 선배는 우리에게 거액의 빚이 있는데다가, 지금 종적을 감췄습니다.” “..........-!!!!!!!” 그럴 리가. 은협이 나에게 전화한 것이 오늘 낮이었단 말이다. 놀란 눈으로 녀석을 쏘아보자, 서준은 표정없는 얼굴로 침착하게 설명하듯 덧붙인다. “오늘 낮에 선배에게 전화한 것이, 아마 일주일 동안 은협이 선배가 걸었을 처음의 통화입니다.” “..............하......... 하지만...나는...” 은협은 나에게 그런 말을 일절하지 않았다. 녀석은 나에게 그저 빌려 쓴 돈 때문에 사람들이 사무실을 점령하고 있다고 말했을 뿐. 또 한편으로 아무리 은협이 이들에게 거액을 빌렸어도 나와는 사실 상관없다. 내가 은협을 좋아한다는 감정 빼고 녀석과 그렇게 깊은 관계도 아니다. 가족같은 관계이긴 하지만, 정말 가족도 아니다. 그런데 납치라니..아니 이거 인질 아닌가, 인질. “나는 은협이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알고 있습니다.” 서준은 다시 얼음을 물컵에 담으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알면 풀어달라고, 이 새끼야..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는다. 이런 싸움에서는 이성을 잃은 사람이 지는 거다. “물론 선배를 납치했다고 해서 은협 선배가 돈을 내놓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녀석은 바에 놓여져 있는 양주를 잔에 부으며 느긋하게 설명한다. 아니, 녀석에게는 느긋한 일인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니다. 나는 적어도 내일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다. 친구를 잘못만난 게 그렇게 인생 꼬이는 일이라니. 마지못해 녀석의 비서 역할을 했던 게 그렇게 잘못이라니-!!! 이 땅의 우정들은 모두 이렇게 바닥을 치고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어 봤지만, 이런 식은 두 번째였다. 하나는 내 손등에 짐승 할퀸 자극이 남은 바로 열 아홉의 그 골목길.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지금. 항상 냉정하고 이성적인 나도 잠시 긴장으로 몸이 아파왔다. 살짝 떨리는 아랫입술에 힘을 주어, 여느 때의 침착함으로 겨우 따졌다. “그럼 이거 풀어. 나랑 은협이는 아무런 관계도 아냐. 나도 윤은협이 어디로 숨었는지 알 길 없으니 말야.“ 정색을 하고 딱 잘라 말하자, 내 머리에 묻어 있던 물기가 셔츠로 뚝뚝- 떨어진다. 서준은 그 말에 대답없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양주를 한모금 축인 채 가까이 걸음을 옮긴다. 순간적으로 움찔- 나는 얼어붙을 것 같은 오싹함에 뒤덮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오싹함이었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고 내게 손을 내밀며 턱을 꽉 눌러 잡았다. “아파- 이 개새꺄...!! 아프다구..-!!“ 손가락 두개에 어떻게 이런 센 힘이 있을까..라고 짜증이 났다. 필사적인 힘을 다해 고개를 이리 저리 저어본다. 녀석의 힘을 피하기 위해 씨름한다. 그러자 녀석은 잡고 있던 턱을 놓으며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순간적인 아픔과 이 부자유스러운 상황에, 나는 짜증이 슬슬 밀려왔다. “하지만 선배님은 썩 괜찮은 인질입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은협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니깐!!.......” 그러자 녀석은 쓰윽 웃었다. 하얀 셔츠 위로 단단한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며 웃는 미소는 일종의 비웃음처럼 차갑다. 그 미묘한 냉기에 저절로 오금이 저릴 정도다. 나도 싸움이라면 지지 않을 정도로 붙을 자신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냉랭함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은협과 이 녀석,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의 객기와 호기였을 뿐. 씩씩거리며 노려보는 내 눈길을 의식한 듯, 서준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선배님이 강은협을 좋아하는 거 다 압니다.” “.........-!!!!!!” “그것도 꽤 오랜 시간이라는 것도.” 비겁한-!!!..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타인의 마음을 공개해서 짓밟으려는 아주 나쁜 속임수다. 그럼에도 속수무책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었고, 또한 웬만한 정보 수집력을 가진 녀석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일이다. 더군다나 녀석은 단호하고 단단해 보였다. 쉽사리 부정할 여지를 만들지 않은 것이다. “은협이에겐 말하지 마.” 나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겨우 되쳤을 뿐이다. 어차피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은 다 알고 하는 말이다.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 아니다. 은협이 녀석만 모르면 된다. 지난 7년 동안 내가 감춰온 감정을. 나를 가족같이 믿고 의지하는 은협에게 나의 그런 부도덕한 마음은 일종의 배신이다. 나는 그 순수하고 철없는 마음이 나에게 실망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지금 상태로 계속되기만을 바랄 뿐. 그러나 마치 마지막 뒤틀림같은 내 고함에, 녀석은 그저 씽긋 웃었다. 양주를 조금 털어 다시 입에 넣으며 그는 가만히 테이블 위 수화기에 손을 올린다. "말할 생각 없습니다.“ “................” “단지 윤은협 이사가 그 젊은 나이에 그만한 성공을 한 뒷 배경에 당신이라는 남자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범법에 해당하는 주가조작이 있었다..라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사실 그것만이 아니죠. ...윤 선배는 우리에게 불법적인 돈을 거액으로 여러번 차액해 갔습니다.” “...........-!!!!!!!!!!” 윤은협의 주가 조작.그것으로 인한 불법 이득과 급속한 회사 성장. 내가 은협이 녀석에게 가진 감정이 비밀이라면, 은협의 회사는 은협 자신의 비밀이었다. 그러나 서준은 어찌된 영문인지 둘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한 협박이다. 둘 다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빌미로 뭔가 얻어내려는 수작이다. 허나 강서준이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녀석은 마치 협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이성을 잃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의자 뒤로 묶여 있는 손의 부자유스러움과 조금 전에 끼얹어진 물기 때문에 급속히 하락하는 체온, 그리고 녀석이 들끓게 만들어 놓은 분노 속에서 나는 잔뜩 그를 노려본다. 강서준 쪽에서만 별로 신경쓰지 않고 양주를 홀짝일 뿐이다. 녀석은 그 이상 이 협박과 기묘한 납치극의 전말을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전화기를 들어, 밖의 누군가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린다. 뭐라고 하는지 내 쪽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이내 문이 일리고 아까 보았던 강실장이라는 남자가 들어섰다. 강실장 역시 잘생긴 사내였다. 서준의 차갑고 냉혈한 같은 표정에 비해서, 그는 조금 따뜻한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갈색 동공을 가졌다. 그러나 이 사내 역시 방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조직의 ‘실장’이라는 직급이면 아무리 명분만이 그렇다 해도 꽤 센 권력을 가진 거 아닌가. 그의 등장으로 인상을 더욱 찌푸리자, 강실장은 서준의 얼굴을 한번 돌아보며 부드럽게 나에게 미소지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라고 말했다. 6. 잠시만 기다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묶여 있던 내실에서 룸 안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한 눈에 보아도 이곳이 비밀 요정 쯤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서준이 속한 조직 내에서 굴리는 몇 개의 요정. 그 중에 하나 쯤 되는 굉장히 화려하고 깨끗한 공간이었다. 몇 번인가 가 본 호텔의 룸 정도 되어 보였다. 커다랗고 큰 침대, 그리고 정갈한 실내 장식과 거울들.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강실장은 부드러운 사내였지만 빈틈이 없어보였다. 그는 잠시 딱하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그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유기연 씨.” 그리고는 나를 홀로 그 방에 남겨두고 나가지 전에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연다. 문고리를 잡은 그의 태도는 어딘가 의심쩍여보였다. “제 이름은 강원우 입니다. 다음번부터는 그냥 원우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나는 댁 이름 부를 일 없습니다.” 차갑게 대답하자 그가 빙긋 웃으며 문을 닫았다. 마치 ‘그럴 일이 있을지 없을지 두고 보세요.’라는 식의 태도였다. 덕분에 혼자 남겨진 나는 씩씩거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다.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혹은, 이제 뭘 해야 할까..라고 생각해보지만, 전화기 한통도 없고 가지고 있던 물건도 다 빼앗긴 내 처지로써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머리가 질끈거리는 바람에 털썩- 침대에 머리를 박는다. 그 때쯤 문이 열렸다. 바로 나를 이곳에 가둬버린 문제의 후배, 강서준이 들어선 것이다. 순간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킨 것은, 녀석이 들어서면서부터 나른하게 넥타이를 풀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살짝 뭔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탓에, 나는 그만 긴장한 것이다. 설마..라고 어떤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친다. 좋지 못한 생각이었지만, 아까 녀석의 협박하던 태도로 보아 어쩌면 맞는 생각인지 모른다. “.....넌 왜 온 거냐.”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남자를 좋아했다. 물론 이따금 여자들이 좋을 때도 있었지만, 주로 내 연애대상자는 남자였다.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은협도 일방적인 관심과 애정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스물 일곱이 되도록 사내 녀석들과 관계를 가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내도록 나의 뇌리를 잡고 있는 것은, 윤은협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 녀석은 내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뭔가 서늘한 느낌이 나를 오싹하게 만든다. 이 장소는 뭔가 특별한 은밀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저절로 속이 뒤엉키고 뭔가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그런 효과. 지나치게 깨끗한 방이었지만, 분명 공기 구석 구석 스며 있는 낯선 정사의 느낌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다소 경직된 채 묻는 내 질문에,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넥타이를 풀어 의자에 걸친다. 그리고는 더욱 기가 막힐 정도로 여유있게 셔츠 단추를 풀었다. “이게 뭐냐니깐!!!.......” 마침내 참지 못하고 내 입에서는 고함소리가 튀어나온다. 녀석은 그 때서야 차가울 정도로 정지된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며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선배는 내 인질입니다.” “.........-!!!!!!!” “윤은협이 모습을 나타날 때까지, 나도 선배에게 받을 수 있는 가치만큼은 보상받을 생각입니다.” “...보...보상?...” “몸으로요. 이 곳은 원래 그런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선배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 아닌가요?“ 말도 안돼....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단박에 침대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녀석은 그런 나를 잡을 생각도,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낮고 잔혹하게 웃는다. “도망가더라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선배.” 문은 잠겨 있었다. 그리고 문 밖에는 보나마나 내가 모르는 녀석의 수하들이 잔뜩 버티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일과 아무런 관련 없다구!!!!.........이 미친 새끼....!!!!!!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하는 바람에 내 눈동자는 저절로 충혈된다. 문 앞에서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다는 녀석의 말을 실감하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고이 고이 모셔두었다고 말하면 웃기지만, 나는 정말 남자를 경험한 적이 없다. 어쩌다 여자와 한번 잔 것- 그것도 대학교 일학년때 선배들의 장난에 의해 술김에 그렇게 된 것 외에는 한번도 경험이 없었다. 차가운 금속 문고리를 손바닥으로 느끼며 분노로 식히려 애썼다. 반면, 녀석은 더욱 여유있게 다가섰다. 철저하게 자신을 외면하는 등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밀어붙이며, 녀석의 냉혹한 숨결이 문득 귓전을 파고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 “다른 어떤 것보다 선배는 은협이 선배에게 마음을 들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든 은협이 선배 곁에 남아 있고 싶을 테니깐요.“ “............-!!!!!!!!!!” 몸이 저절로 떨렸다. 갑가지 몸이 오싹-할 정도로 물기 찬 뭔가가 내 목덜미를 쓸어내린 것이다. 녀석은 느긋하게 내 등 뒤를 음미하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그 순간, 완전히 굳어 버렸다. 녀석의 협박이 옳았다. 나는 여기서 도망가더라도 은협을 버릴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사실 은협이 선배가 어딨는지 알고 있습니다. 만약 선배가 오늘 제대로 내게 봉사해주지 않으면...“ “.....-!!!!!!!!!!!” “나는 얼마든지 윤선배에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선배가 윤은협에게 정말 하고 싶은 짓이 뭔지를.” “이 비열한 새끼..-!!!.....” 좌절감과 뼈아픈 상실감으로 굳어버린 내게, 녀석은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웃었다. 7. 그렇다.나는 윤은협이 내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내가 어떻게든 녀석의 곁에서 나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갖은 힘을 다 썼던 것이다. 그 결과로 거의 십년 동안 녀석은 내 마음을 짐작도 못한 채로 나에게 휘둘렸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것이 녀석과 최후의 이별을 하지 않으려는 내 마지막 안간힘이었다. 그래서 그 댓가는.. “...........앗..........!!!.........” 그 댓가는 참혹했다. 어느 덧, 누군가에게로 세어 들어간 나만의 비밀은, 이 웃기지도 않는 납치극의 빌미로 작용한 것이다. 강서준. 근 칠년만에 처음만난 이 악랄한 녀석은 가혹할 정도로 거칠게 내 옷을 벗겼다. 그리고는 물건이라도 다루듯 침대로 내동댕이쳤고, 내 머리 속은 순간적인 충격과 감정의 일그러짐으로 뒤엉켰다.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이성과 짙은 거부감으로 잠시 손을 내젓자, 서준은 가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묶어 버린다.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밝은 불빛, 그 적나라한 가운데서 몸을 유린당하는 기분은 결코 집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리가 벌려지고, 녀석이 내 허벅지를 핱는 순간까지도 그랬다. 나는 질끈- 두 눈을 감은 채 ‘끝내려면 어서 끝내..’라는 식의 주문만 걸었다. 그러자 그 순간, 녀석이 내 얼굴에 양주를 휙- 붓는다. 다시 얼얼해 질정도로 차가운 얼음 조각들이 얼굴과 몸에 묻어났다. 알싸한 둔통에 눈을 뜨자, 녀석은 거침없이 내 다리를 들어올려 V자로 벌린다. 녀석은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얼음을 부은 것이다. 내가 눈을 뜨고 이 광경을 머리 속에 생생히 담아두도록-. “...............!!!..............” 몸 위로 위치한 사내의 무게는 익숙치 않았다. 더군다나 목을 조를 듯, 한 손으로 쥐고 있는 압박감에 연신 숨이 차 오른다. 잠시 호흡을 조절하기 위해 입을 벌리자, 가차없이 녀석의 얼굴이 내려왔다. “............으응......................” 반응하지 않고, 혀를 움직이지 않으려 최대한 애 썼지만 경험이 부족한 나로서는 속수무책이다. 곧 이어 그 짙은 양주의 향이 입안을 가득채운다. 술에 약한 나조차 그 양주를 마신 것처럼 달콤하고 씁쓸한 타액이 마구 밀려왔다. 숨이 막힐 정도로 녀석의 혀가 입 속에서 마구 움직였다. 그 때마다 저항하듯 허리를 움직였지만, 이내 목을 조르는 듯한 그 느낌에 완전히 포기당했다. “좋은 말로 할 때...” “............” 입술을 잠시 떼자, 그 고집에 기가 막히다는 듯 서준은 쓴 웃음을 짓는다. “보다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선배의 감정도 다치고.. 선배보다 소중한 그 사람도 다칩니다.“ “.........-!!!” 그 협박이 가장 유효했다. 나는 침대가 무너질 정도로 벗어나고자 흔들던 허리를 멈춘 채, 녀석의 혀를 받아들인다. 마음 속에는 씁쓸한 체념만이 가득 차 올랐다. 그래, 윤은협을 기다리고 보호하고 지금까지 견뎌낸 댓가가 이런 식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거친 사포같은 느낌의 혀가 입 천정에서 이를 핥고, 유려하게 움직이며 자신의 타액을 쏟아 붓는다. 목까지 다다를 정도로 마음껏 휘젓은 그 몰캉거리는 녀석의 혀는, 끝내 숨어 있는 내 혀까지 끄집어 내 기어이 자신에게 엉기도록 명령한다. 스스로가 몹시나 비겁하고 자멸감이 들 정도로 비참해 졌지만, 녀석은 가차 없었다. “............으읏.........-!!...........” 그것은 녀석이 입술을 떼어 내고 내 페니스를 사정없이 쥐는 순간에도 그랬다. 마치 물건을 다루는 것 같은 한결같은 태도는 질릴 정도로 잔혹했다. 마지막까지 나는 내 성격 답게 차가운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순간 순간 치고 올라오는 타인이 손길은 나에게 처음 경험하는 충격이다. 그는 그대로 내 것을 꽉 쥐고, 아픔과 통증에 겨운 내가 상체를 들썩이자 열린 다리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타인의 눈에 속속히 공개된 것이다. 그 충격과 수치스러움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추락하게 만들었다. 제발 그만 안기나 하라구, 제발-!!!..이라고 소리치고 싶을 만큼- “조금 아플 것 같네요.” 마치 의사가 환자의 환부를 관찰하듯, 그는 크게 열려진 내 다리 사이의 애널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곳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도 폭발할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나는 단단히 묶여 있었고 녀석의 말처럼 도망갈 여지도 없었다. 혀를 악 물며, 한 글자 한 글자 자르듯 내뱉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빨리 끝내.” 그 말에 녀석은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표정없는 미소에 숨이 막힐 정도다. 나 같은 녀석이 호흡하는데 어려울 정도의 미소란 정말 흔치 않았다. 그러나 그 얼음같은 아름다운 얼굴은, 무표정하게 내 다리사이로 고개를 숙인다. “..........읏...-!!.........” 조금 넣어볼까..라고 녀석은 중얼거리며 내 음부를 쓰다듬었다. 고환을 혀로 핥듯이 페니스를 직접 자극해대자, 순간적으로 몸이 움찔거린다. 관자놀이에 땀이 배이고 거친 본능이 휘어 감았다. 녀석은 밝은 불빛 아래에서 그것을 관찰하듯 교묘하게 가끔 확인까지 하며 고통스러울 정도로 시간을 들인다. 만약 여기서 반응을 조금이라도 하면 가뜩이나 체념 가득한 내 신경에 더욱 패배감만이 쌓일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냉정한 녀석이 바로 강서준이다. 녀석은 내 애널에서 페니스로 연결된 음회부를 혀로 느긋하게 핥으며, 조금씩 떨리는 내 허리를 음미한다. 그리고는 그대로 손가락 한 개를 애널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윽........” 그 바람에 목이 저절로 꺾였다. 한번도 그런 식으로 출입한 경험이 없었다. 그 이물감과 불쾌감은 굉장히 충격적이다. 허나 녀석은 조금씩 발기하기 시작하는 내 것을 보라는 듯, 더욱 혀로 핥으며 가차없이 탐색을 시작한다. “....안돼.....” 그 안에서 움직이지 마.. ..라고 나는 속으로 전율했다. 사내 놈들끼리 어떻게 하는건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 겪는 순간 그것은 절절히 체감온도를 높인다. 통증을 동반하고, 노골적인 수치심과 혼란이 뒤범벅된 채 범해지는 것이다. 온 몸이 붉게 물들었다. 손가락은 끝내 몸 안에서 애널의 점액을 느끼듯 내부에서 움틀거리고 있었다. 몸 안에 깊이 박혀 오는 다른 생명체의 느낌은 굉장히 교묘하다. “천성적으로 남창이군.” 자신의 손가락이 박힌 내 몸의 입구를 관찰하며, 녀석은 표정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누구라도 그런 자극을 받으면 그렇게 된다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조금씩 할딱거려지는 입안으로 세어오는 양주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녀석이 나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며 조금 더 혈관이 확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허리를 움직여, 유기연.” 그리고는 머리 속에 술이 얼얼하게 오를 때 쯤에, 그는 내 솟아오른 유두을 입안에 넣고 굴렸다. 벗겨진 몸이 맞붙으며, 녀석의 발기한 그것과 내 것이 마주치며 미묘한 열기를 내놓는다. 독한 술 때문에 머리 속이 정말 어질 어질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읏.............” 내 유두는 녀석의 입 안에서 유린당하고, 내 페니스는 녀석의 단단한 복부에 닿아 쓸렸다. 더군다나 민감하고 섬세한 주름들이 자리잡은 애널은 녀석의 한 손가락에 의해 잔뜩 벌려져서 숨이라도 쉬는 듯 움찔거리기 시작한다. 어찌할 바를 몰라 숨이 계속 차오른다. 녀석의 입술이 가슴을 벗어나 쇄골을 더듬듯 키스하며 목선을 거칠게 빨아들인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자극이 남기 때문에 나는 훅-하고 숨을 들이 마시었다. “몸을 더 벌려요, 선배. ...앞으로 계속 익숙하게 해야 하는 일이니깐.“ “........-!!!!!!!!!!...” 그리고 녀석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움직여 삽입했다. 깊숙이 관통하는 뜨거운 몽둥이는 바로 녀석의 살점이었고, 그것은 이내 쓰윽하고 밀려 들어와 몸 안에서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래가 뜯겨나갈 듯한 통증과 함께 신경이 온통 마비된 듯, 제멋대로 비명이 튀어 나온다. 정말 참혹하게 아팠다. 내가 제 정신이 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몸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아악-!!!!!!!!!!!!!!!!!!!!” 나는 고함을 지르고, 묶여 있는 손목 아래가 완전히 감각 없어질 정도로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굉장한 열을 품고 있고, 단단한 그것은 찢을 듯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뿌리까지 단단하게 결합한 채 교접을 잊지 않게 만들었다. 온통 땀으로 젖은 내가 비명과 고통으로 의식을 잃을 때까지 계속해서 유린은 진행되었다. 손을 흔든다. 숨을 멈춘다. 그리고 내 몸안에 들어온 또 다른 타인의 감정없는 광기를 고스라니 끌어안는다. 미묘한 열기의 종자가 내 몸으로 뿌려졌다. 여자도 아닌 사내의 몸 안으로, 같은 수컷의 액체가 가득 채워진다. 그리고 이 악랄한 행위는 조금씩 내 살을 갉아먹는다. <흔적. 2> 1. 단지 윤은협을 좋아했을 뿐, 그토록 평범하게 살던 남자 스물 일곱의 유기연. 그러나, 나는 팔렸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강서준은 누차 그 사실을 반복해서 말했다. “윤은협을 나서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선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선배를 파괴하는 게 우리의 목적입니다.”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 나는 그 곳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대부분은 묶여 있었고, 첫날 범해진 잔인한 흔적조차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 정신이 파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다만, 제정신을 차려야만 복수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내 온전한 독기가 문제였을 뿐. “나야 말로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냉정함이 뚝뚝 흐르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조금 전에 겨우 밥을 몇 알 씹었다. 말 그대로 먹는 차원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쌀 몇 톨 씹는 것으로 나는 잠시 생존 의지를 기억해냈다. 안으로 들어오는 밥이라도 제 때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처참할 정도로 몸이 엉망이 된 며칠 후였다. 첫 번째는 충격 때문에 얼얼하고, 두 번째는 거의 무감각해졌다. 그 이후를 숫자를 세지 않았다. 벌써 일주일이 흐른 것이다. 녀석이 내게 소염제를 건네고 열이 나는 몸을 욕실에 처박았을 때도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세 번째 관계 이후로 나는 녀석의 목적을 알았다. 아무 말없이 조금전에 자신과 접합했던 내 몸의 부위를 손가락으로 넓게 벌렸다. 녀석은 표정없이 연고와 약을 들고 들어와 침대 한 쪽에 시체처럼 널브러진 내게 말했던 것이다. 약을 발라줄테니, 벌려요..라고. 온 몸이 붉게 달아오르는 수치감을 무릅쓰고 나는 침대에 앉은 채 양 다리를 넓게 벌렸다. 앉은 자세로 벌리고 허리를 살짝 내리자, 녀석이 그 허벅지 사이에 꿇어 안는다. 이런 기묘한 자세는 한번도 취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단 일주일 만에 나는 이곳의 생리를 적절히 이해했다. 녀석이 나를 협박의 구실로 삼고 있는 윤은협도, 사실은 단단히 이 통증의 원인이었다. 내가 심하게 저항할수록 협박은 더더욱 비열해졌다. 녀석은 언제나 ‘윤은협에게 알려도 좋습니까?’라는 말 한마디로 이 상황을 깨끗이 종결한 것이다. 절대 감정을 들켜서는 안 된다. 아무리 윤은협이 인간 말종의 머리통 가벼운 녀석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지난 10년 가까이 소중한 대상이었다. 마침내 나는 온 몸을 붉게 물들인 채, 아직도 녀석의 것이 움찔거리며 세어나오는 애널을 손가락으로 벌렸다. 약을 발라주기 위해 내 아랫도리에 얼굴을 붙인 녀석이었지만, 참을 수 없을만큼 모멸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녀석은 그걸 즐겼다. “너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강서준...“ “............” “윤은협은 나 때문에 뭔가를 포기할 녀석이 아냐. 그 녀석은, 내가 여기 인질로 잡혀 있건 아니건 신경도 안 써.“ 그러자 녀석이 피식 웃는다. 뜨거운 숨결이 민감한 하체에 닿자, 저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그럴 겁니다. 선배. 윤은협은 무신경한 녀석이니깐요.“ 고등학교 때부터 서로 좋지 않았던 은협과 서준이다. 좋아하지 않을 만큼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굳이 나를 이 곳에 가두고, 이런 혹독한 짓을 벌이는 이유는 뭘까. “하지만, 선배...” 약을 발라주기 위해 애널의 점막을 손가락이 쓸어갔다. 주름 하나 하나 까지 녀석에 의해 이미 관찰당하고 꿰뚫어졌다. 나는 몹쓸 정도로 녀석에게 범해지곤 했다. “그렇지만 윤은협도 곧 나설 겁니다. 적어도 언제까지나 비겁하게 숨어 있지는 않겠죠.“ 녀석은 온화하게 말했다. 다리를 벌리고 앉은 내 자세는 숨기지 못할 정도로 비참했는데, 녀석은 나날이 더 자신감에 불타는 것 같아 머리 뚜껑이 다 열린다. “니가 착각...하고 있는 거다, 강서준.” 나는 그 녀석에게 내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런 짐승같은 짓을 할수도 있지만, 그 녀석은 달라. 절대 나를 위해 자신을 포기할 녀석이 아냐. 우리의 감정은 그 깊이가...이만큼이나 달라. 그걸 나에게 굳이 말하게 만드는 너 역시 비열하고 질 나쁜 악당이고. “저는 착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녀석은 단호하게 말하며 허리를 일으켰다. 그제서야 녀석에게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하반신에 재빨리 침대보를 덮는다. 아무리 그래도 녀석에게 유린당하기 위해 날마다 벗겨진다는 것은, 같은 사내에게 몸을 보인다는 것 이상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윤은협은 곧 나타날 겁니다, 선배.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파괴되어야 꼭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윤은협은 그런 타입입니다.“ “.........소중한 것이...파괴돼..?............” 나는 따뜻한 면 이불 아래로 다리를 꼼지락거리며, 다소 충격을 받은 채 중얼거렸다. 녀석은 넥타이를 챙겨 맨 채, 담배를 빼 물었다. 언제나 행위가 끝나면 담배를 물곤 하는 녀석이다. “선배는 은협이 선배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윤은협이 자신의 그런 감정을 알아차리기 전에 그 소중한 것을 조각 조각 파괴해 놔야 희열을 느끼구요.“ 쓰윽- 담배를 한 쪽으로 문 채, 녀석이 웃었다. 그 잔혹한 미소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깐, 녀석이 나를 감금하고 협박하여 유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윤은협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만약, 은협이 나타나서 스스로가 벌려놓은 일을 마무리하고 돈만 갚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억지로 내 몸을 가질 이유도 없다. 목적은 처음부터 나 자신이었다. 나를 파괴하는 게 윤은협을 파괴하는 거라고 믿는 강서준의 어이없는 심리 때문이었다. 나는 혼이 빠져 나가는 듯한 격렬한 분노와 허기를 동시에 느낀다. 말도 안 된다. 이런 일에 휘말려서 이렇게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게!!! 그러나 녀석은 흡족하게 미소지으며, 양복 자켓을 들어올렸다. 그대로 멍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내 턱을 쓸어내리듯 손가락으로 집으며 서준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마음껏 파괴되세요, 선배. 선배가 엉망이 될 수록, 강은협도 엉망이 되고.. 그러면 제 목표는 달성 됩니다. 선배의 정신을 타락 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저는 뭐라도 합니다.“ “..............-!!!!!!!!!!!!” 그리고 녀석은 그곳을 나갔다. 언제나 이 곳에 갇힌 채, 웅크리고 있는 나는 한마디로 사육당하는 동물과 다를 바 없어진 것이다. 그 사실을 오늘의 대화로 완전히 인식하고 말았다. ..나는 그 순간에 완전히 추락했다. 2. 강실장- 그러니깐 자신의 이름을 강원우라고 소개한 이 친구는 처음부터 이런 일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이곳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닌 사람이었다. 물론, 그래봤자 일반 사람들보다 십억분의 일만큼 미소 짓지만- “오늘부터는 외출하셔도 됩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옷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막 샤워실에서 나와 침대에 다시 숨죽이고 누워 있었다. 식사를 가져다 놓고, 그가 한걸음에 다가와 촤르륵- 객실 커튼을 열었다. 창 밖으로 뭐가 있는지는 며칠 전에 사실 확인했었다. 도망갈 여지라도 찾기 위해서 아무도 없을 때, 나는 몇 번이나 커튼을 열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절망했다. 이곳은 무려 6층이나 되는 높이였고, 나는 다른 공포증은 없지만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것이다. 그 높이에서 뛰어 내리거나 한참 떨어진 다른 건물로 몸을 날릴 정도로 나는 운동신경이 뛰어나지도 못했다. 그 이후로는 커텐을 늘 쳐 놓고 지냈다. 행여 옆 건물에서 누군가 여기를 보게 될까봐 겁이 나기도 했고, 이곳에 납치된 이후로는 절대 햇빛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가장 멋진 무기는 바로 절망이다. 강서준은 나를 날마다 절망에 빠뜨리는 최고의 빠른 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외출한다고 해 봤자, 분명히 너네 놈들이 따라 붙겠지.” 씁쓸하게 되내이자, 강원우가 맑은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일주일 넘도록 여기서 지내는 동안, 저 문 안으로 들어온 딱 두 사람의 타인 중 하나다. 하나는 강서준- 나머지 하나는 강원우- 하나는 내 생명을 단축이라도 시키려는 듯, 오직 범할 목적으로만 들어왔고, 나머지 하나는 놀랍게도 그런 내 생명을 연장하려는 듯 식사를 늘 들고 들어왔다. “그렇게 야만적이지 않아요. 언제든지 나가실 수 있어요.“ “............??...........” 그가 가져다 놓은 깨끗한 셔츠를 들어 올린다. 아마 이 사내도 이 곳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날마다 나는 내가 아닌 듯 변해간다. 지나친 긴장감과 고통, 그리고 철저한 감금 - 어쩌면 세뇌하듯 길들이는 동물적인 행위, 그런 것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버티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적응하던지, 아니면 죽던지- 미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아쉽게도 나는 죽을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서준이 녀석은 은협에 대한 응징의 의미로 나를 안는 것이고, 내가 호락 호락 안길 의지가 없어보였기 때문에 협박을 가하는 것이다. 외출을 해도 된다는 오랜만의 허락에, 어쨌든 질끈거리는 허리를 일으켰다. 옷을 챙겨 입고 겨우 밥을 몇 술 뜨자, 그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던 강원우가 친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청바지 뒷 주머니에 보면 지갑이 있어요. 돈은 필요할 만큼 넣어두었으니 사용하셔도 됩니다.“ 내가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여기서 망쳐지는 댓가- 화대처럼 지급된 지갑의 수많은 돈들과 내 가족같은 은협이 녀석을 지키는 것- 단 두 가지 만으로 나는 보상받을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그리고 원우가 웃었다. 그가 나보다 두 살이나 많다는 것을, 나는 며칠 전에야 들었다. 그렇다면 서준보다는 세살이나 많은 나이다. 그러나 그는 늘 깍듯했고 또한 가장 친절했다. “중요한 것은, 저녁 7시가 될 때까지 돌아오셔야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친절한 사람이라고 해도 협박하는 방식은 둘이 서로 닮아 있었다. 내가 7시까지 이곳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했다. 은협이 다친다. 그것은 은협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나 역시 다친다는 말이다. 3.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워뒀는지, 아파트 입구 앞에는 우유가 썩고 있었다. 그리고 신문도 싸여 있었다. 혼자 산다는 것은 이럴 때 너무나 불편하다. 머리카락까지 몽땅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도 누구하나 찾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열 여섯에 고아가 되어 버린 나는 그래서 은협에게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그 일년 뒤에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갑게 굴며 담배를 찾던 그 녀석- 마치 커다란 개처럼 생각 단순하고 착해빠지고 이기적인 그 녀석. 달칵-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이 오랫동안 없는 장소를 나타내듯 잠시 허한 바람이 불었다. 아파트는 죽을 듯 살 듯 7년을 고생해 모은 돈으로 얻은 전세다. 그나마 은협이 녀석도 자주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잠들곤 해서 더욱 정이 간 곳이다. 어차피 7시 전에만 들어가면 되는 일이고, 나는 기왕 들어온 것 이것 저것 옷가지를 챙기며 무심결에 자동응답기를 눌렀다. 핸드폰은 이미 훨씬 전에 서준 일당에 의해 박살이 났던 것이다. 삑-하고 작은 통신음이 들리고, 전화기 안에서 녹음된 은협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는 다소 넋을 놓고 앉았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저절로 이 일들에 대한 현실감이 들었다. -야, 유기연! 너 어딨는거야, 대체!!!!- 벌떡- 나는 이 문제의 원인이 된 은협이 이곳에 숨어 있기라도 한 듯 심하게 심장이 두근거린다. 생각은 딱 두 가지였다. 이 녀석이 내 눈앞에 나타나면 정말 두 번 다시 안 볼 사이처럼 얼죽 죽여버리겠다는 생각 하나와..그리고, - 사무실 사람들 말로는 서준이 그 새끼가 데리고 갔다는데 일주일 동안 도대체 어딨는거야!!!!!!!!!!!! - 3 그리고 이 녀석이 나타나면 위험하다는 것. 그래, 이왕 망쳐진 것 조금만 더 녀석의 버팀이 돼 주자..라는 아주 천사표 같은 생각. - 아무튼, 오자마자 이거 들으면 나한테 연락해! 여기 번호가 ***-**** 이야! 너 도대체 뭐야, 유기연!! 핸드폰도 끊어버리고 집에도 안 돌아오고!!! 서준이 그 새끼가 너한테 뭐라고 한 거야!!??? 그래도 우리가 지 고등학교 선배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아주, 혼자서 별 흥분을 다하는 군..나쁜 새끼..............” 녀석은 역시 그 앞뒤 안 가리는 성격답게 개망나니처럼 전화기에 대고 마구 성질을 부린다. 휴우-라고 복잡하고 어지러운 심경 때문에 나는 쇼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오랜만에 태양을 보았다. 그래서인지 시선이 가물거린다.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인간 강서준의 그 말이 잠결에 떠올랐다. ‘원래 소중한 것이 파괴되어야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차리는 미련한 인간들도 많습니다. 선배. 윤은협은 그런 사람입니다.‘ 4. 원래 은협은 고등학교 때 적이 많았다. 녀석이 워낙 철딱서니가 없는데다가 너무나 순수한 마음으로 여기 저기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서 미워하는 녀석도 꽤 있었다. 그러나 좋아하는 녀석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 덩치도 크고, 순수하고 철없는 아이 같았다가도 한번 또 빡 돌면 무섭게 주먹질도 했던 녀석이라 주변에 친구도 많았다. 그러던 와중, 우리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강서준이 입학했다. 한 해에도 늘 새로운 입학생이 생기고 떠나는 졸업생이 생긴다. 그러니 강서준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였을 리 없고, 서준도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윤은협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고, 또 누구에게 시비가 붙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언제나 시작은 은협의 그 철없는 행동들 때문에 생겨났으니, 뭐 누구를 탓할 마음이 없다. 은협과 서준은 시작부터가 안 좋았다. 바로 잘 나가던 일학년 강서준의 누나를 겁도 없이 꼬득인 은협이 잘못한 것이다. 녀석은 물론 나이트에서 전혀 모르고 꼬신 것이라고 두 손을 싹싹 빌었지만, 문제는 조금 깊었다. 어린 여고생은 은협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은협이 그녀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날 유산을 한 후 시름 시름 앓았다. 물론 은협이 녀석은 끝까지 아무 것도 몰랐다. 그녀가 임신 한 것도, 정신적 충격으로 자연유산을 한 것도, 그리고 학교를 퇴학당한 것도..그것이 서준의 누나라는 것도-! 처음부터 이 일의 뒤처리는 내가 맡았다. 나는 이미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울 때부터 냉정한 편에 속했고, 어지간해서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서준에게 유린당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부터 서준은 우리와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아니, 사실 서준이 그 차갑고 악마같은 시선으로 우리를 노려본 것, 특히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은협을 보호하는 나를 노려본 것은 언제나 그 때부터였다. 녀석의 입장에서보면, 원래 단순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은협보다 당연히 사리판단이 있으면서도 은협을 늘 보호하는 내가 미운 것이다. 나라도 응당 그랬을 것이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언제나 더 얄밉다. 하지만, 나도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 그 이후로 서준의 누나가 다행히도 몸을 회복하고, 공부에 전념하며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라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는 내 인생도 죄의식이 가득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남으로 인해서 그 일은 곧 잊혀졌다. 무엇보다 나는 우정으로 은협을 지켰으므로 되었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강서준의 입장은 달랐던 것이 분명하다. 그 녀석은 역시 나를 망치고 은협을 망쳐야 할 당연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5. 7시가 되기 전에 나는 칼같이 돌아왔다. 그런 쪽으로도 역시 나는 엄격한 편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맨손으로 성공해야 하는 이 삶에서, 지켜야 하는 것들을 지키는 방법이 있다. 냉정해지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 “외출은 좋으셨습니까?” 강원우가 입구에서부터 나를 맞이하며 물었다. 나는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내가 갇혀 있는 곳이 어딘지를 똑똑히 알았다. 그곳은 강남에서도 가장 멋뜨러지고 화려한 건물의 6층. 즉, 밖에서 보면 그것이 절대 비밀 요정이라고는 꿈에도 모를 정도로 잘 꾸며진 건물이었다. “그냥 호텔인줄 알고 묵는 투숙객도 많습니다.” 친절한 남자, 강원우가 엘리베이터에 동승하며 말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상대방의 기분을 풀어주는 성격인 것 같다. 말없이 내가 벽에 기대자, 그는 이내 정색을 하고 안색부터 살폈다. “얼굴 빛이 안 좋네요.” 당연하지. 얼마나 혹사당하는데. “확실히 서준이 형님이 악랄한 면이 있죠.” 서준이 형님? 안 그래도 어린 나에게 꼬박 꼬박 존댓말 하는 것도 거슬리는데, 더 어린 서준이 녀석에게 형님이라니..기가 차며 내가 웃자, 상대방은 유연한 태도로 나른하게 덧붙였다. “규칙입니다. 이곳에서는 서열이 높은 쪽이 형님입니다.” 그렇다면 서준이 서열이 높다는 의미고, 서열이 높을 뿐이라면..서준은 아무래도 이 조직의 총수는 아닌 것 같다. 은근히 머리 속으로 계산하는 사이 6층에 도착했다. “오늘은 서준이 형님이 못 오십니다.” 강원우가 문을 열어주며 덧붙인다. 그 자식이 오든 안 오든 나랑은 상관없었다. 그런 의미로 싸늘하게 쳐다보자,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부드럽게 웃는다. 아무래도 그의 말처럼 ‘이곳’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을 고려치 않고 무조건 자기 스타일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 “강원우씨.” 나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객실에 들어서며 냉정하게 잘라말한다. 그렇다면 이 쪽에서도 마이 스타일대로 움직여 주고 싶다. “나에게는 존댓말 쓰지 마세요. 저는 그 쪽 사람도 아니고, 이 일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그런 격식있는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강원우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조금 난감한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역시 자기 할 말만을 하고 있다. “기분이 안 좋으신 게 당연해요. 윤은협씨와는 그냥 단순한 친구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알면서도 납치한 그 새끼가 나쁜 거 아닙니까?” 문을 닫고 나가려던 강원우는 그 말에 잠시 흠칫 놀란 듯 멈췄다. 내 쪽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데 새삼 놀라는 것도 웃긴다. 그러나 강실장은 조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셨나보네요.” “..........??........” “서준이 형님은 이 일과 별로 상관없습니다. 다만, 큰 형님이 하도 화를 내셔서요. 강은협씨가 큰 형님 하시는 사채에 손을 많이 댔는데, 한번도 제 때 완납한 적이 없어서.. 이 기회에 제대로 버릇 고쳐 놓으라고 화를 불같이 내셔서.............“ “.........-!!!!...........” 당연히 강서준은 조직 내의 실력자 이긴 했지만, 큰 형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준의 오래되고 해 묵은 복수심을 자극하는데 썩 괜찮은 빌미였던 것이다. 비록 서준이 시킨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녀석은 어느 정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견딜 수 없다. 나는 강원우의 등 뒤로 날카롭고 잘라 말했다. “그 새끼..언젠가는 내가 갈아먹고 말겠어..” <흔적. 3> 1. 삽입할 때마다 아직도 몸이 움찔거린다. 그것도 언제나 대낮같이 밝혀둔 불 아래에서 노골적으로 꿰뚫어지는 치욕감은 절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녀석은 자신에게 볼 일이 있을 때를 빼 놓고는 언제나 손님처럼 이 방에 들어온다. 갈수록 많은 자유를 허락받았지만, 또한 갈수록 이 녀석의 몸도 자주 칩입했다. 방 안에 노트북이 들어오고, 강원우가 여전히 친절하게 인터넷 선을 연결해 준 어떤 날, 강서준은 어김없이 밤 늦게 객실로 들어왔다. 비록 외출을 허가받았지만, 은협이 있는 곳에는 절대 발길도 내밀지 못할 나였기 때문에 갈수록 기운은 침체되었다. 그러나 녀석은 언제나 밤 늦게 마치 주인처럼 방 안에 들어와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행위를 누차 반복하는 사이, 나는 이 곳에서 점차 길들여지는 나 이외의 음란함에 자주 치를 떨어야 했다. 처음부터 느끼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던 계획은 늘 무참하게 박살났다. 녀석은 있는 힘을 다해서 나를 도발시켰고, 점점 자극이 강해질 때마다 쥐어짜듯이 사정을 강요당했다. 견딜 수 없을만큼 범해지는 것에 점차 익숙해지는 것도 두려울 정도다. “...히잇..........” 항상 아무렇게나 쑥 밀려들어오는 사내의 성기. 그리고 짐승처럼, 단순한 배출의 저장고로 다뤄지는 몸. 개가 행위를 하듯 엎드린 채, 내 입구는 벌겋게 달아올라 녀석의 피스톤 질을 감당했다. 조금 전에 녀석이 잔뜩 핥아대는 바람에 미끈 미끈한 점액을 토한 내 페니스는 다시 한번 부풀어 오르며 아랫도리를 뻐근하게 만든다. “........아아............” 엎드린 채 침대보를 움켜쥐고, 녀석과 연결된 부분에서 야한 소리가 날 때마다 나는 흔들림을 견디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몸은 나날이 익숙해지고 감도가 좋아져서, 아주 작은 반응에도 저절로 다음 것을 기다리며 반응하기 시작한다. 원치 않았는데도 쓰윽-빠져 나가는 굵은 녀석의 페니스를 느낄 때마다 본능적으로 허벅지 사이에 힘이 간다. 욱-하고 짧은 신음을 서둘러 이빨 사이로 막아보지만, 이미 하체는 하염없이 음란하게 젖고 있었다. 고통스러웠지만, 고통을 희석시키기 위한 자기 보호의 수단처럼 내 머리는 자주 짧은 쾌감을 목말라 했다. 녀석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내가 이런 행위들로 온통 망가지는 것을 아주 적절하게 즐기고 있었다. “.......으으응............” 마지막까지 저항처럼 머리를 흔든다. 내 턱까지 땀이 저절로 흘러 내려와 빗물처럼 뚝-뚝- 침대보를 물들였다. 그러나 곧 거침없이 손이 앞으로 내밀어져, 엎드린 채 흔들리는 유두를 꼬집어 댔고, 그 아찔한 자극에 견디다 못한 나는 불쌍할 정도로 가늘게 흐느끼며 몸 안의 압박감에 전율해야 했다. 하체가 붙었다 떨어지고 , 다시 붙었다 떨어지는 몇 번의 동물적인 움직임이 끝날 때까지 나는 거듭해서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2. 마침내, 삼주일 쯤 흘렀을 때 나는 녀석을 향해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 전에도 나신으로 엉켜서 엄청나게 범해지고 말았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을만큼 후들거린다. 견딜 수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몸은 사내에게 익숙해지고, 정신은 절망으로 떨어져 내린다. “차라리, 그 때의 일을 복수한다고 말해, 강서준.” 그 때 쯤에야, 역시 넥타이를 매고 밖으로 나가려던 녀석이 행동을 멈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런 일들에 길들여지려고 하는 자신이다. “복수?” 그러나 녀석은 되례 의아한 듯 고개 돌린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속을 알 수 없을만큼 자신을 숨기는데 철저한 이 녀석을 향해 눌려진 증오가 폭발할 지경이다. “비열한 녀석. 고등학교 때 일 때문에 니가 이러는 거 아냐? 니 누나 일 말야. 은협이랑 니 누나 사이에 있었던 일. 그게 아니라면 네가 나에게 이런 짓까지 벌일 이유가 없지. 단순히 윤은협이 나서길 바랬다면, 네 예상은 이미 틀렸다는 걸 말했을텐데.“ 조금 전에도 얼마나 비명을 내질렀는지 입안이 바싹 말라붙었다. 절로 갈라진 음색이 튀어 나온다. 녀석은 내 지친듯한 읖조림에 가만히 머리를 흔들더니 짧게 한숨쉰다. 그리고는 쓰윽-하고 세련되게 넥타이 매듭을 마저 정리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녀석이 가까이 다가온 것은 옷을 말끔하게 다 입은 후였다. 그리고 흠칫- 역시 나는 녀석이 다가올 때마다 놀랜다. “저 그렇게 음울한 놈 아닙니다, 선배.” “............-!!!!!!!!!!!!” 조금전까지 마음 껏 자신의 손가락에 걸어 잡아당기던 내 머리카락. 아직도 땀에 흠뻑 배여 있는 머리카락을 장난처럼 다시 손에 걸며 녀석은 중얼거렸다.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다. “복수라뇨... ....말했듯이, 선배는 그냥 썩 괜찮은 인질일 뿐이예요.“ “...............” “..선배를 가지고 있으면, 윤은협이 반드시 나타날테고.. 그 사람의 그 대책없는 안 좋은 습관도 고쳐질테고,... 또 선배도 역시 윤은협에게 굶주린 시선을 보내느니, 나와 즐기는 게 나을테구요.“ 즐겨? 이런 관계는 절대 즐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냥 이용당하고 마는거지.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녀석을 쏘아보자, 그가 작게 목너머로 웃었다. 생긴 것만은 정말 끝내주게 아름다운 녀석이 아무리 보아도 내 몸에 반했을 리는 없고...역시 그냥 노리개 였는가 보다. 적당히 노리개로 삼으면서, 신선함도 느끼고..또 한편으로는 윤은협을 위협할 구실도 생기고.. 녀석은 정말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휙-하고 차갑게 녀석의 손가락을 거둬낸다. 도무지 몸에 닿으면 발작할 것처럼 놀래는 내 신경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그런 모양을 보면서도 녀석은 표정없이 싸늘하게 미소짓는다. “하긴, 강은협이 그런 막 대먹은 녀석이 된 이유에는....” “.............” “..선배 탓도 있죠. 언제나 그런 식으로 오냐 오냐 해 주니깐, 그 인간이 정신을 못차리는 겁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어느 비 오는 날, 강서준과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교복을 입고 4번을 만났다. 바로 그의 누나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였다. 그 때도 이 녀석은 눈빛이 사나운 미청년이었고, 나는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은협에게는 내가 심리적 비서였다. 여전히 그 때처럼 녀석을 노려보자,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마치, 정액받이 같은 내 역할이 끝났다는 듯 침착하게 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그 뒷모습에 갑자기 나답지 않게 울컥-하고 뜨거운 기운이 몰려왔다.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기어이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시계를 과격하게 던졌다. 와장창-하고 문에 부딪치며 시계는 박살났지만, 문은 두 번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 숨소리도 분노 때문에 더욱 거칠어진다. 내 차가워진 심장을 비집고, 녀석의 농간에 의해 분노라는 인간의 감정이 튀어 나왔다. 나는 내가 처음으로 인간에 대해 이런 증오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 3. 도대체 강서준에게 얼마를 빌린 거냐..라고 나는 은협에게 겨우 이메일을 띄웠다. 전화를 쓰거나 직접 은협을 방문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걱정시킬 생각은 없었다. 메일에 대한 답장은 하루를 넘겨서 도착했다. 녀석은 구구절절 말하진 않았지만, 간략하게 액수만 적어 보낸 것이다. 아무리 생각 없는 녀석이라도 분명히 앞뒤 정황으로 보건데, 내가 위험에 빠진 것을 알 것이다. “...2억이라...” 나는 침대에 누워 노트북을 허벅지에 올려놓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최근에 샤워를 하다가 내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장난 아니게 살이 빠진데다가, 하도 안에만 있어서 조금 창백해진 얼굴이었다. 더군다나 요새와서 부쩍 친밀해진 강원우 실장과 조금의 경계심이 누그러진 나 사이에도, 이 안색에 대한 대화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했었다.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강원우는 언제나 내가 마시기 좋아하는 커피와 간식을 준비했다. 유달리 눈치가 좋은 이 사내는, 내가 어떤 음식에 더 많이 젓가락질 하는지 관찰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커피 정도는 언제나 마실 수 있도록 직접 객실 안에 메이커를 설치해 주었다. “내 얼굴이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걱정입니까.” 나는 신랄하게 되받아치며 강원우의 말을 씹는다. 언제나 얼굴빛을 걱정하는 남자다. “대단한 얼굴이죠. 무려 2억의 상징적인 의미니깐.“ “.......-!!!!!!!!!” 그는 비꼬는 말도 웃으며 한다. 내가 이곳에서 시체처럼 겨우 삶을 연명하는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 꼭 저렇게 덧붙인다. 벌떡- 나는 노트북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서며 냉랭하게 커튼을 젖혔다. 다시 한번 도망갈 구석을 찾고 있는 거다. 이번에 도망가면 아예 비자를 받아서 몰래 출국해 버려야겠다. 비록,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지만, 사람 많은 싱가폴이나 홍콩 같은데 숨어 있고 싶었다. 다시 한번 이 모든 상황에 끝내 지치기 시작한 것이다. 오직 물건처럼 취급하는 그 모든 사람들, 윤은협, 강서준, 강원우. 그들 모두에게 얼마나 내가 자존심 강하게 떠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을 정도다. 나를 파괴하려면 백분 멀었다, 강서준. “하지만 제가 서준이 형님의 입장이었다 해도....” 강실장은 슬리퍼를 갈고 침구를 정리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언제나 성격이 부드럽고 침착한 그는 아무래도 이 조직 내에서 강서준의 비서같은 역할인 것 같다. 은협이 같은 녀석에게 내가 필요하다면, 차갑고 냉정한 서준에게는 저런 녀석이 나름대로 필요하다. “제가 서준 형님이었다 해도, 분명히 이런 방법 밖에는 없었을 겁니다.” 가끔 그는 나를 목욕시켰다. 아니, 굳이 표현하자면 내가 목욕하고 있을 때 당당하게 샤워실에 침입해서 등을 닦아주었다. 나는 필요 없었지만, 역시 이 인간도 내 명령을 들을 인간이 아니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편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듯, 시키지도 않고 오히려 욕만 얻어먹을 비누질을 곧잘 해 댄다. 오늘도 샤워하는 중간에 그가 들어왔다. 이 빌어먹을 요정같은 러브 호텔은 욕실에 따로 잠금 장치가 없는 것이다. 사실, 대략의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잠금 걸쇄가 필요할 리 없겠지만. “핑계지. 강서준이 하는 짓은 그냥 핑계야.“ 그리고 악랄하고 비겁한 짓이고, 범법 행위지...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강원우는 내 뒤에서 작게 웃는다. 부드러운 비누칠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언제나 엄격하고 차가운 사람들 틈에서 이런 정도의 인간성에 혹하는 유약한 내 일면이 싫을 정도다. 나는 본시 약한 녀석이 절대 아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도 기연씨가 2억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무슨 그런...” 사람을 어떻게 다들 돈으로 생각하는거야..라고 불만스럽게 말하자, 그가 따뜻한 물을 등에 끼얹으며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안마를 한다. 직업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적당히 힘이 실린 그 손길에 뻐근한 근육들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확실히 강원우는 이 조직 안에서 가장 믿을만한 존재다. “모르셨습니까? 윤은협씨 옆에 비서인 유기연씨가 있다는 걸 조직 내에서는 다들 압니다.“ “....알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본인은 상관없으시겠지만....” 그리고 나서 천천히 두드리는 손길이다. 꽤나 기분이 풀어진 나는 손바닥에 거품을 만들며 혼자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차갑고 냉정한 나 자신을 끝내 잃어버린 걸까. “본인이 모르는 것도 위험한 겁니다, 기연씨.” “...........???..........” 이상하게 덧붙이는 강원우의 목소리에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인지 그 때까지는 정확하게 와 닿지 않았다. “아마, 서준 형님이라면 본인이 가진 감도를 정확히 알 때까지 기연씨를 괴롭히겠네요. 여기 저기 기연씨에게 남은 자국을 보면 충분히 알겠지만요.” 마치, 자신은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그 말투에, 나는 순식간에 기분이 멍해져서 그를 노려보았다. 역시 정말 아쉽다는 표정이고, 퍽이나 씁쓸한 미소다. 그는 뒤가 켕기는 듯한 내 궁금증을 정확히 풀어주려는 듯, 다시 한번 명확하게 미소지었다. “저도 반했으니깐요.” “.......-!!!!!!!!!” 그러나 그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부드럽게 마사지에 몰입했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나는 서둘러 다시 냉정을 되찾으며,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 “어떻게 하면 그 녀석에게서 도망갈 수 있지?” 현재 내 삶의 유일한 목표. 바로 이 지긋 지긋한 덫에서 도망가기.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두어번 다시 묻자, 강원우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내 눈을 응시했다. 별 거 다 묻는다는 표정이었다. “여기서 나가는 법요?”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겨우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강실장은 작게 한숨을 쉰다. 도망가는 것과 이 곳에서 나가는 것은 다르다. “당연히 윤은협 씨가 돈을 다 갚으면 됩니다.” “....................” 그렇다면 내 몸값은, 녀석이 채불한 기간 만큼의 화대와 같군..이라고 나는 더욱 쓴 입맛을 다신다. 어떻게 해서든 은협에게 돈을 돌려주라고 해야 내가 인간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아아..어쩌면 이것은, 단군 신화와 같지 않은가. 인간이 되고 싶으면 동굴에서 백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어라..라는. 4. 마침내 결심했다. 나는 은협에게 비장한 메일 보냈다. 내 아파트 전세금을 빼..라고. 그 아파트 전세금이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다들 모른다. 미친 듯이 일하고 동물같이 일해서 번 돈 1억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모아도 겨우 번다는 게 2억에서 3억이다. 그런 돈을 함부로 써대는 이들 모두에게 화가 났다. 나는 어떻게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점점 지쳐갔고, 이제야 서서히 내가 정리해야 할 것이 뭔지를 깨달았다. 바로 이 일의 화근이 된 윤은협이야 말로 내 삶에서 정리되어야 할 첫 번째 대상이었다. 강서준의 말이 맞다. 어느 정도는 내가 은협을 그렇게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나만을 바라보게 만든 댓가. 그 보상이 너무 크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사내의 배출구로 쾌감에 점점 가까워지는 이 상황이 초조해진다. 이 심장을 가득 채우는 나의 살기가 언제 밖으로 튀어나올지가 가장 두려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파멸한다. 나는 정말 강서준을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감금되고 납치되고 유린당한지 딱 일 개월. 나는 마침내 내 피같은 돈을 강은협의 뒤치닥꺼리에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한두번도 아니지만, 이번에야 말로 끝이다. 나는 더 이상 고등학교 이학년 때, 장난과 혈정에 얽매여 손가락에서 피를 끊으며 의형제 어쩌고를 했던 그 시절의 유기연이 아니다. 이것으로 은협과 나의 인연도 끝이다. 정말 완결이었으면 좋겠다. 만약, 그것으로 나와 녀석의 이 끈질기고 빌어먹을 우정이 쫑나야 맞는 거다.- 아니, 적어도 이제 정말 일어설 수도 없을만큼 지쳐서, 내 스스로가 은협을 포기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 내 아파트 전세값 1억을 빼. 그리고 니 사무실 계약 보증금 5000만원도 빼 내. 둘이 합쳐서 담보로 잡고 은행에서 나머지 금액을 어떻게든 빌려. ....이번에 나 못 구하면 넌 죽을 줄 알아, 강은협!...- 그렇게 메일을 띄운 날도 어김없이 녀석에게 안겼다. 몇 번의 동물같은 신음들, 그리고 부질없는 저항, 언제나 그 저항의 말미에는 기다렸다는 듯 뚫고 들어오는 몸- 내 머리 속이 점점 갈라진다. 욕실의 타일들처럼 산산조각 나기 전에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삶에서 나는 살아남기를 희망했다. 그러니, 네가 제거되어야겠다. 강서준. 5. 언제나 벌려지는 다리. 내장을 밀어 올릴 듯 끝까지 치고 들어오는 타인의 성기. 그 뜨겁고 단단한 열기들에 숨이 막힌다. 보통 때도 이 녀석은 가차없이 다뤘지만 오늘은 더욱 유난했다. 항상 받는 자극조차도 아프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가해진다. 심지어는 뭔가 연고 같은 것을 유두와 애널에 조금 문질러 바르는 통에 나는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하윽..............” 처음에는 단순한 윤활유 같은 건가..라고 생각했는데, 연고가 발라진 곳에서는 견딜 수 없이 열기가 치솟는다. 피부를 뚫고 나오는 듯한 고통이 교묘하게 쾌감으로 변질되었다. 약이다... ...견딜 수 없이 안기게 하는 그런 약. 내 마지막 남은 정신을 파괴하려는 녀석의 짐승같은 악랄함. “........허헉.............-!!!!!!!” 나는 입 밖으로 자꾸 솟아지려는 당혹감을 막고자 손을 들어 간신히 입술을 틀어막는다. 그러나 나를 엎드리게 한 채 손가락과 입술로 여기 저기 물어뜯듯 입 맞추던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찰싹 찰싹 때렸다. “.................-!!!!!!!!!!” 숨을 쉴 수 없을만큼의 비참함과 수치가 몰려왔다. 그러나 녀석은 내 허벅지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있는대로 벌리게 만들고는 불처럼 타오르는 애널에 이내 머리를 박는다. 그 관찰과 시선, 그리고 직접 교합 장소에 와 닿는 숨결을 피하고자 아무리 허리를 흔들어도 소용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녀석을 재촉하는 것처럼 더 없이 음란하게 보여질 뿐이다. 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지금까지 녀석이 항상 나를 안았지만, 이렇게까지 센 자극을 가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일어서.” 그는 마침내 내가 약기운과 자신의 뛰어난 애무로 지칠 때 쯤에 말했다. 이미 내 것은 익숙해진 이 관계를 상징하듯 잔뜩 달아올라 복부에 닿을 듯 단단해져 있다. 그러나 녀석과의 관계에서 내 것은 아무런 소용없는 장식품일 뿐이다. 언제나 뒤 쪽으로만 느끼도록 녀석이 한달 넘게 길들여왔기 때문에, 당연히 내 성기는 우유빛 정액을 조금 내비치며 안달하고 있을 뿐이다. 거기다가 녀석이 악랄하게 약을 바른 유두는 마치 여자처럼 잔뜩 부풀어 올라 흔들린다. 나는 정말 미쳐버릴 정도로 굴욕감에 젖어 들었다. 내 의지와 냉철한 이성을 철저히 무시하는 내 몸- 그것이 바로 파괴의 기본이라는 걸 강서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자존심이 높은 녀석이고, 이런 몸으로 잔뜩 길들여져 상대의 화장실이 되어 버린다는 것에 참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간이 이제 한달이 조금 넘어 버린 것이다. 도망갈 방법을 보다 적극적으로 찾는 동안, 녀석은 오늘 따라 더 악랄하게 굴기로 작심한 것 같았다. 이미 약을 바른 몸 때문에 애널은 움찔거리며 확장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지독하게 일어설 것을 강요한 것이다. 그리고 겨우 간신히 일어선 채, 허리도 채 다 피지 못하는 나를 향해 녀석은 침대에 앉아 느긋하게 명령했다. “보여 봐요.” 확-하고 정신이 돌아버릴 정도로 너무나 처절한 명령. 즉, 내가 사내 앞에서 이미 속까지 젖어서 애원할 정도로 달아올라 있고, 그 증거로 자신의 눈을 보며 자위하라는 명령. 견딜 수 없는 바람에 내가 쉰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앞을 가린다. 언제나 보여지는 이 곳이 이렇게 수치스러운지 몰랐다. 정말 돈으로 팔렸고, 협박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에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키는 녀석을 증오했다. 이미 충분히 싫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녀석이 짐승으로 보였다. 그러나 강서준.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내가 온 몸이 분노와 수치로 붉게 물들고, 눈꼬리에 물기마저 배일 정도로 길길이 뛰는 것을 분명 즐기고 있다. “어서 해. 하지만 끝까지 가진 마요. 적셔질 정도로 충분히 정액이 나오면, 그 대로 뒤로 돌아서 스스로 입구를 벌려. 항상 내가 약을 발라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야.“ 그것도 심한 요구였다. 약을 발라줄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나 자신도 내 몸의 변화를 알 정도로 내부가 들썩이고 있다. 허벅지 사이가 너무나 무거워서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영화를 감상하는 태도처럼 녀석은 느긋하게 앉아 흐느끼는 듯한 내 고통과 절망에 미소지었다. “윤은협에게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낼 수도 있어. 선배는 모르지만.. 이 방 곳곳에 비디오가 설치되어 있거든.“ “.......-!!!!!!!!!!!” “은협이 선배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친구 유기연. 그런 선배가 사실은 이렇게까지 엉망인 사람이고.. 거기다가 그런 모습으로 자신을 원한다고 생각하면 윤은협도 참 좋아하겠군.. 그렇지 않아?“ “......-!!!!!!!!!!!!!!!!!!” 이렇게 악랄하게 구는 이유가 뭘까. 나는 계속해서 몸을 파고들 듯 전해지는 약기운과 그 약에 지배당한 채 음란하게 움찔거리는 입구, 그리고 화끈거리며 어쩔 줄 모르는 가슴에 절망했다. 정말 도망갈 수 없다. 더군다나 나를 제일의 비서, 또한 제일의 친구, 가족같이 여기는 은협에게 이 모습을 보낸다는 것에 한번 더 체념 당했다. 나는 마침내 열과 수치로 온 몸이 젖을 듯한 땀에 물들어서 손을 앞으로 내민다. 손가락 끝까지 벌벌 떨리는 기분에 겨우 발기한 내 것을 잡고 앞 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녀석의 눈 앞에 똑바로 서서 마치 추잡한 몸을 증명하듯 점점 더 달아오른다. 녀석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어서 반응하길 소원하며 손을 움직인다. 꽉 닫은 눈꺼풀 사이로 뜨거운 기운이 몰려왔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악연들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처음으로 완전히 나를 포기했다. “좋아. 정말 윤은협에게 선배의 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을 정도야.“ 흡족한 것처럼 웃는 목소리가 들린다.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사정액이 세었다. 그대로 쾌감에 가서는 안된다는 명령이 다시 내 귀를 뒤덮는다. 더군다나 약을 바른 곳은 아직도 화끈거리며 이미 잔뜩 뭔가를 죄일 듯 초조하게 열이 오른 것이다. 몸 안까지 뜨거워지는 약 때문에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나친 수치감과 굴욕감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좋아’라는 말을 듣자마자, 손가락에 묻은 내 정액을 뒤로 묻힌다. 그것도 녀석이 시키는 것처럼 겨우 겨우 떨리는 몸을 뒤로 돌려, 반쯤 엉덩이를 녀석의 눈 앞에 들이댄 자세로 말이다. 선 채로 입구를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잔인하고 더욱 나를 짓이겨 놓았다. 정말 음란한 창부처럼 나는 숨을 할딱이며 흐느낀 것이다. 이 굴욕감은 결국 쾌감을 원하는 약의 기운에 지배 당한다. “더 똑똑히 보여야죠, 선배. 나는 선배의 거기가 얼만큼 벌어지는지 다 알고 있거든.“ 자신의 사정액이 묻은 손가락으로 양쪽 엉덩이를 벌린다. 그리고 포획자의 눈 앞에 드러나 치부에 잔뜩 그 점액을 묻히고 가늘게 할딱였다. 어서..라는 기분이 처음으로 들었다. 턱까지 치고 올라오는 열기와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이 뒤범벅된 나는 마침내 자포 자기 한 것이다. 단 한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정말 넣어주길 원했다. 어떻게든 이 잔인한 열기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마치 열병같은 윤은협에서도 탈출하고 싶듯이, 잔뜩 젖은 녀석의 것이 들어와 주길 원했다. 부들 부들 떨며 다리를 더 빼며 스스로의 손가락을 찔러 넣는다. 그러자, 녀석은 아무런 표정없이 내 몸을 돌려세워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엎드린 채로 핥아요.” 한번도 해 본 적없는 펠라. 그것도 사내 녀석의 것. 나는 한번 망설였지만, 녀석이 짓궂게 음모 안으로 손을 밀어 넣자 펄쩍 뛰어 오를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지금으로써는 손만 대도 갈 것처럼 뜨겁다. 여전한 치욕감- 내 몸의 통제력을 잃은 것에 대한 그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며 나는 말없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리고 드러나 녀석의 거근을 입에 담아 숨가쁘게 빨아드린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확인한 적이 없는데..이렇게 큰 것이 몸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했다. “음.................”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잡아당기며 녀석이 만족스러운 소리를 낸다. 입안의 점막이 착 달라붙듯, 녀석의 것을 자극해대는 것이다. 가끔 녀석 쪽에서는 이런 일을 해줬기 때문에 알고 있다. 정신없이 내 자신의 타락을 벌하듯 녀석을 빨아들인다. 말그대로 나는 나 스스로를 체벌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순간에 이성을 잃은 채 끝내 굴복하고만 나 자신에 대해 벌한다. 덜컥- 그러나 바로 그 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 순간적으로 너무 놀란 까닭에 얼굴을 들려고 했지만, 거친 손이 머리를 꽉 누른다. 나는 기절할만큼 충격을 받았다.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이 짐승같은 행위에도 굴하지 않고 내 등뒤에서 말하는 목소리. 바로 강원우 실장이다. 언제나 조용하고 침착한 음성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다. 내 쪽에서는 뛸 듯이 놀랬지만, 나는 다리를 움츠리고 허리를 내리려는 시도를 저지당했다. 자신의 것을 그대로 내 입안에 담아두도록 시키며, 강서준이 발을 뻗어 허벅지를 걷어찬 것이다. 엉덩이를 다시 강원우에게 내밀고, 같은 사내의 것을 입에 담은 채 헐떡이는 비참함에 정말 눈물이 났다. 나는 그때야 말로 정말 참혹할 정도로 눈가에 물기가 배였다. 자존심이 강하고 늘 이성적인 내 자신을 존중했던 나는 이 순간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자, 일어나.” 그리고 자신도 참지 못할 정도로 발기하자, 그 때서야 녀석은 나를 일으켜 세운다. 차마 등 뒤로 돌아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강원우가 보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타인의 시선- 그것에 관찰당해지는 상태로 나는 올라타도록 종용당했다. 이 상태로 앉아 있는 녀석의 몸 위에서 삽입당하면 그야말로 강실장에게 제대로 보인다. 남자의 몸을 알고 그것을 음란하게 질끈 조이는 내 한 부분-그 짐승같은 행위를. 모멸감으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지만, 녀석은 용서없이 손목을 잡아끈다. 그리고 낮고 분명하게 덧붙였다. “도망갈 방법을 물었다구요?” “..........-!!!!!!!!” 녀석이 악랄해진 이유였다. “..그것도 당신에게 적당히 반한 강원우 실장을 이용해서?” “..........-!!!!!!!!!” 그것이 이 체벌의 이유였다. 내가 스스로 자신을 올라타 삽입 당하고, 그 결합된 모습과 소리까지 상대방인 강원우에게 관찰 시키는 것- 마침내 허리를 움직여 흐느끼던 내 몸이 녀석의 것을 품었다. 아까부터 잔뜩 열이 오른 애널은 있는 힘껏 확장하여 녀석의 거대한 것을 감싸 안는다. 내부에서 그 뜨거운 기둥이 정신없이 움직이자, 나는 보통 때와는 다른 굉장한 압박감과 꽉 밀착된 마찰력에 정신이 나갈 정도였다. “...아.....안....돼... ...................제발.... ....보지마...” 녀석이 허리를 잡고 흔들 때마다 낯 뜨거운 신음이 연신 터진다. 마침내 느껴버린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협박에 의한 종속감으로 길들여져 왔지만, 오늘은 나조차도 너무나 괴로울 정도로 높게 느껴버렸다. 그 순간, 나는 정말 동물이 되었다. 굴욕감이 머리 속을 완전히 장악하여, 내 스스로를 부셔버린 것처럼.. 그것은 강렬한 엑스터시(ecstasy). 쾌감이라는 숨가쁘고 검은 짐승에 완전히 사로 잡혔다. 헐떡이며 붉을 혀를 낼름거리는 그 황홀함이 내 몸을 핥았고, 욱씬한 이빨이 핏기를 모두 빨아들이듯 목덜미에 박힌다. 등줄기가 싸해지고, 머리 속이 하얗게 변질되는 쾌감-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신음하며 매달릴 정도의 미친 쾌감이 나를 지배했다. “아웃..........그만... 아앗...앗! 앗!................“ 보지마, 제발..이라고 마음은 애원하고 있었지만, 몸은 결합된 채 수치스럽게 흔들린다. “......히잇-!!!!!!...........” 마치 구멍난 허파의 휘파람처럼 가늘고 날카로운 비음이 내게서 솟구쳤다. 문득, 몸 안에서 이리 저리 휘저으며 뜨거운 마찰을 가던 것이, 한 정점을 건드리는 순간 튀어나온 비명같은 소리였다. 갑자기 그 순간에 차르륵- 척추를 타고 엄청난 전기가 흘러간다. 나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부들 부들 떨며, 방금 전에 맛본 그 지독한 쾌감에 오열할 정도였다. 마침내 듣게 된 그 절정의 소리에 만족한 듯, 녀석은 더욱 심하게 내 허리를 흔든다. 저절로 목을 뚫고 튀어나온 새파란 교성. 그것이 몸 안에서 움찔거리는 화염에 맞춰 수치심도 잊은 채 애원하듯 자꾸 터져 나왔다. “..으응...아응..............” 도저히 내 것이라 믿기지 않는 달콤한 신음이었다. 혀를 깨물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내가 절대로 낼 수 없는 가장 부끄러운 소리였던 것이다. 마치 단단한 사내에게 안겨 애원하는 듯, 난잡한 여자처럼 잔뜩 다리를 벌리고 흐느끼고 만다. 나는 눈조차 뜰 수 없었다. 감은 망막 사이로 하얗게 터지는 마약같은 쾌락- 열락에 가득찬 몸이 갈구하며 빨아들이는 사내의 상징. 목이 저절로 꺾이고 애원하듯 녀석에게 매달리며 허리를 휘는 그 강렬한 도취를 갈구했다. “.........아읏...............” 관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완전히 잊혀졌다. 녀석이 삽입된 곳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듯, 내 엉덩이를 양 쪽으로 잡고 벌렸지만, 나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에 스스로 녀석의 목에 손을 감았다. 그렇지 않으면 뒤로 쓰러질 것 같았던 것이다. 사람의 이성을 완전히 박살내는 쾌감. 완전히 광기에 점령당한 몸은 난잡하게 반응할 뿐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주르륵- 눈꼬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결국 내 안에 단단히 얼어있던 심장을 깨뜨리고 야수가 기어 나왔다. 6.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전에 한번도 없었다. 이렇게 이성이 완전히 무너지고, 내 몸에 죽어있던 감각이나 감정이 동시에 동물처럼 튀어나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는 그동안 그토록 절제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손을 움직일 수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있자, 녀석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다시 담배를 빼어 문다. “제가 심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 “사실은 선배의 그 우는 모습을... 강실장님 아니라 은협이 선배에게 보여줬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 나는 내가 오늘 느껴버렸다는 것에 가장 절망했다. 어차피 강원우야 이 방에서 벌어지는 일을 뻔히 알고 있고..비록 그에게는 충격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더한 충격이 있었다. 바로 느꼈다는 것... 이런 관계에서 반응해버린 내 몸과, 아무리 약기운이었다고 변명해봐도 지워지지 않을 강렬한 쾌감. 또다시 나는 무서워졌다. 내가 나 아닌 것으로 변해가고, 단순한 배출구의 역할에서 쾌감을 느껴버린 스스로에게 깊게 충격받는다. “날 놓아줘.” 처음으로 부탁하듯 말했다. 이렇게 정색을 하고 애원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만큼 나에게는 자존심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이 사내는 그런 나같은 종속들이 가장 적절하게 망가지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나를 그냥 심심풀이 노리개, 그리고 단순한 지난날의 복수의 대상, 혹은 채무 관계를 해결할 적절한 열쇠 등등으로 여길지 몰라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머리 속이 텅 비는 듯한 격렬한 자극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원하는 몸이 되어 간 것도 깊게 고통스러웠다. “내가 놓아주어도 선배는 정신 못 차려요.” 그러나 여전히 잘생긴 미간을 조금 흐리며, 녀석은 씁쓸하게 대답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한 표정에 나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오늘 윤은협을 만났습니다.” “............-!!!!!!!!!” “그는 선배를 잡고 있다는 내 말에 길길이 날 뛰더군요. ...이만하면 원하는 반응 아닙니까.“ 그렇다고 너 같으면 이런 상태로 녀석에게 돌아갈 것 같아?? 다시 한번 불이 날 것같은 눈동자로 쏘아보자, 녀석은 쓰게 웃으며 담뱃불을 비벼 끈다. “하지만 선배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감정을 숨기고 적당히...윤은협 곁에 있을 겁니다.” “......놓아주기나 해. 내가 돌아가서.. 그 돈을 갚도록 만들어줄게.“ 그러나 녀석은 작게 고개만 저을 뿐이다. 이를 갈며 자신을 노려보는 내게, 일말의 표정도 없이 그는 그 방을 나갔다. 언제나 손님처럼 굴고, 손님처럼 행세하며 철저히 나를 길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정오에 나는 행동에 나섰다. 필사적으로 탈출해야 할만큼 뭔가 쫓기는 기분이 된 것이다. 외출은 처음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조금 떨어진 종로에서 은협을 만났다. 그것도 공개적인 장소보다는 작은 여관에서. 우리는 메일로 주고 받은 내용처럼 서로 다른 시간에 여관에 투숙했다. 그러나 약속 시간에 내 방으로 찾아온 은협은 턱이 떨어져 나갈 듯 놀래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너!!!!!!!!!!!!” 질끈- 나는 눈을 감는다. 언제나처럼 냉철하고 이성적인 친구인 유기연이다. 이 녀석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녀석은 다그치듯 날뛰기 시작했다. “강서준이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한 거야!!! 너를 협박이라도 했어??!!!!! 얼굴이 왜 그래? 왜 그렇게 창백해진 거야?? 엉?? 넌 이런 녀석이 아니었잖아!!!!!“ 아아..그래. 협박했지. 바로 너에 대한 내 감정을. 그러니깐 소리 좀 그만 질러. 안 그래도 머리가 떨어져 나갈 듯 아파. “돈은 마련했어?” 나는 질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겨우 대답했다. 가장 중요한 본론부터 매듭짓고 싶었다. 날뛰는 어린 사자는 나중에 설명해줘도 늦지 않다. “돈? 물론 마련했지!!!“ 그러나 녀석은 역시나 내 예상에 걸맞게 1억밖에 마련하지 못했다. “내 집 세를 받아내라니깐..” 언제까지 이 상태로 지내야 하나..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냉정하게 잘라 말한다. 윤은협도 지금 상황에서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내가 왜 이 따위 녀석에게 반해 지금까지 모진 고통을 겪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러나 녀석은 그 순수하고 맑은 눈빛으로 곤혹스러운 듯 내 타박에 고개 젓는다. “하지만, 집이 빠져야 계약금을 받지! 서준이 일당들이 무슨 수를 쓴 건지, 아무도 집을 보러 오겠다는 사람이 없다구!!!...“ 맑고.. 언제나 상대방을 의심없이 믿는 이 눈초리. 나는 갑자기 그 동공을 오랜만에 쏘아보며 마음이 싸하게 아팠다. 아니 울컥-하고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흘렀다. 조금 살이 빠지고 많이 하얗게 질린 표정. 여관 속 거울의 나는 그런 모습이었다. 살이 빠지는 바람에 옛날부터 문제였던 한 쪽 눈의 홑겹의 쌍꺼풀이 드리워졌고, 밤마다 시달리는 것을 대변하듯 눈 밑이 검게 피로로 차 오른다. 그 바람에 눈은 더 커보였고, 그렇게 노리개감으로 갖고 놀만한 구석은 아무리 봐도 없지만..그래도 아무튼 이전의 내 모습은 아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서 예나 지금이나 처음보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재수없다고 생각할만 하지만, 지금 그 눈꼬리 끝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매달려 더욱 날카로운 빛이 담겨 있다. 나는 매번 거울을 볼 때마다 타인 이상으로 이미 나 자신에게 절망하고 있었다. 그것을 같이 느끼기라도 했는지 은협이 스스로의 머리를 마구 때리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나는 바보야!! 내가 바보야!! 내가 머저리 미친 놈이지!! 왜 그런 사고를 쳐서, 너 까지-!!!!“ 정말 자책하는 것이다. 녀석은 분해 죽겠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마구 박아대며 울먹이기 시작한다. 그 덩치 큰 녀석이 스물 일곱이나 되어서 자책하는 꼴은 못 봐주겠다. 휴우-라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손을 내밀었다. 은협은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선 채로 내 목을 와락 끌어 안는다. 이 아무 것도 모르는 착해 빠진 녀석은 절대 모를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당해왔는지.. 그리고 사실, 이 녀석에게만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지켜야 한다. “은협아...........” 녀석의 가슴팍에서 소금끼 냄새가 났다. 무더운 계절을 등 뒤로 하고 달려온 체향이다. 가만히 숨을 들이쉬자, 퍽 오랜만의 그 체취가 알싸하게 마음을 움직였다. “돈을 마련해. 너 강서준이 어떤 녀석인지 잘 알 거 아냐....강은협. 부탁이니깐.. 내 집..어떻게든 처분해 봐...“ 내가 중얼거리자, 내 머리 위에서 녀석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마침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린다. “나..........결혼해.” “.....-!!!!!!!!!!” “...물론 이 일이 다 마무리 되고 니가 무사해지고 나서 말야.” 아아.. 나는 지금까지 뭘 기대해 온 걸까? 바로 이런 말? 바로 이런 헤어짐? 모든 것이 항상 이 녀석 때문에 일어났다. 처음 강서준의 누나 강여준을 만났을 때가 문득 떠오른다. 그녀는 젖어 있었고, 파리해진 얼굴로 눈가에 기미마저 껴 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차갑고 침착해지려 애썼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너무나 그녀가 가련하고..또 한편으로 그녀의 아기도 불쌍했다. 철없는 은협 때문에 우리는 피해자가 되어 버렸고, 나는 그 녀석을 짝사랑하는 내 처지마저 잊혀질 정도였다. 그래도 애써 입을 열어 그녀에게 은협을 놔주라고 말했다. 차가운 내 태도에 질린 그녀가 쓰러졌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것도 학교에서 하혈하는 바람에 바로 퇴학당했다는 것도. 바로 그 가슴 아픈 일 때문에, 나는 강서준과 처음으로 만났던 것이다. 당시 고등학교 이학년인 강서준과 고등학교 삼학년인 나는 서로를 진하게 노려보았다. 서준은 나를 한대 칠 기색이었지만, 그것을 애써 눌러담으며 냉정하게 말했었다. ‘당사자인 윤은협은 어디가고 선배가 나오셧습니까.’ 그 때 내가 말했었다. ‘그 녀석과 나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 볼 일 있으면 나에게 말해. ....한 대 때리려거든 나를 때려.‘ 그러나 그 때도 여전히 어른스러운 거친 눈빛의 서준은 아름다운 얼굴을 흐리며 낮게 내뱉었다. ‘여차하면 윤은협 대신에 자신을 죽이라고 말하겠군요.’ 나는 두 번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 때, 녀석이 각목을 쥐고 잠시 망설였다. 당시에 불던 차가운 바람이 뺨에 닿았다. 한동안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녀석은 이내 내려칠 기색이었던 각목을 조용히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조금 당황했던 나, 그리고 여전히 조용한 음성이 강서준. 서준은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그 때 말했었다. ‘윤은협은 복받은 인간입니다.’ ‘....................’ ‘자신을 대신해서 선배가 그렇게 나서는지 죽어도 모를 인간이죠. ....그래서 윤선배에게 유기연이 필요한 거겠죠...‘ 그리고 녀석은 돌아섰다. 잠시 멍해진 나를 두고, 강서준은 그 날 그렇게 복수를 단념했다. 차라리 그 때 몇 대 맞거나 죽었다면 지금처럼 참혹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머리 정수리에서 농구공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윤은협을 향해 나즉히 중얼거렸다. “울지 마, 개새꺄......” “.....하지만,............” “..울지말고 돈이나 마련해.” 그래야 이제야 내가 널 떠나지.. 완전히 포기하고 정리하지...라고 나는 들리지 않게 속으로 중얼거린다. 강서준이 뭘 생각했는지 몰라도 한가지는 성공했다. .. 적어도 나를 윤은협에게서 떼어 놓는 것- 그것이 바로 서로에게 더한 복수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흔적. 4> 1. 여느 때처럼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이 없는지 인터넷을 확인하는 순간,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 밖으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하며 나는 조용히 노트북을 닫는다. 강원우가 굉장히 복잡한 얼굴로 들어섰다. 그 날, 무참하게 범해지는 모습, 아니 그것을 갈구하는 나를 들킨 이례로 나는 이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늘상 침착하다. 서준이 냉혹하고 얼음같은 반면에 그는 적당히 인간적이다. 한걸음에 들어온 원우는 별로 그 때 일을 떠올리지 않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시 피해 계셔야 겠습니다.” “..........??..........” “문제가 생겼습니다.” 혹시, 그 은협을 그렇게 벼르고 있다는 ‘큰 형님’의 방문인가!!?? 펄쩍- 나는 하늘을 뛰어 오를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2. 분명 처음 납치될 때 탔던 차. 그것을 원우가 직접 운전하며 몰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문제가 사라질 때까지 피해 있어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하긴, 나는 모른다. 그래봤자, 자기네 조직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닌 것이다. “잠시만 밖에 있도록 하죠, 기연씨. 어디로 모실까요? 딱히 가고 싶은 곳 있으세요?“ 왠지 나는 그 호텔같은 요정 안에서 나를 박탈당한 것이다. 속세와는 전혀 인연에 담쌓은 사람처럼 내 기분은 가라앉았다. 이쯤의 외출이라면 적어도 기분 좋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질 못했다. 백밀러로 살짝 돌아보며 친절하게 웃는 강원우와도 아직 껄끄럽다. 나는 그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척 하면서 짧게 대답했다. “*** 고등학교로.” 그곳은 내가 졸업한 학교였다. 3. 차는 부드럽게 미끄러져 운동장 안으로 들어섰다. 아마 수업을 받는 듯 학교 전체가 조용하다. 오는 길에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고급 승용차 바퀴에 온통 모래로 얼룩졌지만, 강원우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비가 오는데요?” 내가 문을 열고 나갈 기세를 보이자, 그는 재빨리 돌아보며 만류하듯 말한다. 그러나 나 역시 머리 속에서 혼이 빠져 나간 듯 정신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그런 그의 표정을 잠시 지켜보다가 말없이 문을 연다. 찬 물을 맞아야 정신차리지...유기연. 첨벙 첨벙- 운동장에 고인 물을 밟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놀란 그가 뒤따라 내렸다. 잘생긴 상대방의 얼굴도 온통 물기에 젖었다. “이봐- 당신은 봐 줄 거라고는 얼굴 뿐인데, 아깝잖아?“ 나는 흡사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중얼거렸다. 비에 젖은 상대방은 묘하게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 말에 대신 웃는다. “여기는 댁의 그 대단한 형님 강서준과 내가 졸업한 학교야. 아..그러고 보니 사고뭉치 윤은협도 있었지.“ 씁쓸하게 덧붙이자, 내 눈 앞으로는 환영처럼 그 날들이 떠올랐다. 잘생긴 강서준, 그리고 호탕한 무식인 윤은협. 또한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차가운 나, 유기연. 내가 정처없이 비를 맞고 서 있자, 당황한 강원우가 재빨리 앞을 막아선다. “생각 같아선 강서준 곁에서 빼 내고 싶지만......” “....................” “..오늘은 안 됩니다. 조직 사람들이 안 그래도 지금 벼르고 있어요.“ “................??...” “지금 우리 조직은 두 개 정도의 의견이 팽팽히 대립되어 있습니다. ...기연씨는 강서준의 아래에 있는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이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길은 저도 모릅니다. 큰 형님은 잔혹하고 무서운 분이기도 하지만.. 조직에서 돌아가는 실정을 다 알고 계세요. 조직 내에는 지금 스파이가 하나 있고.. 그의 정체와 처벌에 대해 다들 촉각이 곤두서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윤은협이 자금을 갚지 않았고, 당신이 대신 잡혀 온 것이죠. 뭔가 그들의 신경을 누그러뜨릴 대상이 필요한데, 그게 당신일 수도 있습니다. 보스부터 해서 양쪽으로 갈라진 대립 상태의 조직원들 모두.. 하지만, 하다못해 보스도 지금의 당신을 건드리진 못합니다. ...그가 당신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은....“ 그 부분에서 강원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침을 삼키는 목울대가 비에 젖는다. 의아해 진 것은 되려 내 쪽이었다. 조직의 보스가 나를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 은협을 벼르고 있다는 그가 여태 얼굴 한번 비추지 못한 이유. 내 의심찬 눈초리를 받던 강원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보스는 당신을 건드리고 싶어 합니다. 충분히..” “...........” “...다만, 당신이 이미, 서준의 것이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할 뿐입니다.” “............-!!!!!!!!!!!!!!!” 서준의 것? 강서준의 것?? ..진짜 웃기고 자빠졌네. 이 개새끼들. 서른 다 되어가는 나이에 내가 들은 가장 웃기는 농담이야, 강원우. 이 개들의 발정기. 너네들은 땡기면 동물처럼 갖고, 그것을 자신의 소유라고 우기냐? 그게 니들의 본능이야? 짐승같은 새끼들. 겉으로는 친절한 척 하고 항상 뒤로는 칼을 들이대는 이 사회의 악. 당신도 그래. 강원우. 당신이 언제부터 나를 알았다고 그런 안타까운 눈빛을 지어!!!!!!!!!!!!!!!! 나는 이미 삐딱해질 때로 삐딱해졌다. 이미 상대방의 호의 같은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잔뜩 입술을 비틀며 잔인하게 그의 말을 씹는다. “그런 호의 따위는 개한테 주라 그래, 강원우. 필요없어지면 어서 나를 죽여. 어차피, 당신들에게 파리같은 목숨이잖아? 당신도 명령만 받고 움직이는 개와 똑같고 말야.“ “............-!!!!!!!!!” “그래도 당신은 유일하게 믿을만한 놈이라고 생각해. 그나마 그 전체 녀석들 중에 나에게 가장 인간적인 녀석이 당신이지.. 하지만 말야..“ “........기연씨..” “..하지만 말야. 내가 정말 당신의 형님이라는 작자.. 강서준을 죽이는 날이 온다해도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 흠칫- 상대의 얼굴이 지나치게 변하며 굳어갔다. 나는 교묘하게 웃으며 더욱 신랄하게 입술을 비튼다. 죽여버린다, 다들..그래. 이렇게까지 온 거, 서로 완전히 죽여버리자. 나는 그대로 그 침묵을 즐기며 아이들의 수업 타종이 울릴 때까지 비를 맞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선택한 삶을 벌하는 듯한 그 차가움이 이미 좋았던 것이다. 빗방울이다. 또 한번의 그 지랄같은 빗방울- 내 삶이 운동장에 패인 물웅덩이처럼 패여있다. 묘하게 손등에 세겨진 상처가 욱씬거린다. 십자 상처와 야수의 발톱 그 모두- 4. 돌아왔을 때는 이미 감기에 걸려 있었다. 강원우가 조금 딱딱해진 얼굴로 약과 물을 챙겨주고는 나갔다. 그런 말에 반응할 정도의 사람인지 미처 몰랐다. 묘하게 섭섭해져서 나는 약을 먹고 다시 눕는다. 머리가 어질 어질하고 목이 꽉 막힐 만큼 열이 났다. 그리고 허리도 아프고 온 몸 구석 구석 나른하게 삐걱거린다. 아아..감기 몸살에 걸릴만도 하지..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들어서는 서준의 얼굴을 노려본다. “오늘은... ...그만둬................“ 그리고 바싹 마른 입술을 열어 힘없이 쏘아붙였다. 오늘같은 날도 안으려 한다면, 정말 너는 인간 이하다..라고 덧붙인다. 그러자 녀석은 이미 강원우에게 보고 받았다는 듯, 말없이 침대에 앉아 얼굴만 들여다본다. 내 쪽에서 고개를 휙 돌렸지만, 다시 억센 손길이 턱을 돌려세웠다. “무슨 짓이야.............” 다시 차가워진 음성에 녀석이 작게 웃었다. 하긴 녀석이 웃는다고 해봤자 제대로 미소짓는 게 아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듯한 절절한 미소가 아니다. “학교에 다녀오셨다구요.” 개들-!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허상같은 의리를 쫓아 사회에 암적인 존재로 군림한 개들-!!! 나는 열이 잔뜩 베인 눈으로 녀석을 노려본다. 그러자 녀석도 애초에 할 마음이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나를 일으켜 세우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이 많습니다. 선배.. 쉬세요.“ 그리고는 정말 오해할 정도로 온화한 눈빛으로 말했다. 만약 내게 조금의 힘이라도 있었으면 턱을 한대 날렸을 정도로. 녀석은 물론 그런 험악한 시선에는 개의치 않고 나를 돌려세우며 가볍게 어깨를 주물렀다. 뭉친 근육과 약발이 돌기 시작한 몸은 허공에 붕 뜬 듯, 다소 몽롱해지고 만다. “선배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 “색기가 넘치는 타입이니깐 조심하세요. 일처리 깔끔한 강원우조차도 몇 년전부터 눈 독 드리고 있었으니깐요.“ “....-!!!.....몇 년...전?...” “..네. 몇 년 전. 제가 막 여기 들어왔을 때도 강원우는 이미 선배를 알고 있었어요.“ 흠..이라고 나는 낮게 신음을 낼 뿐이다. 귀 담아 듣지 않았다. 그저 어깨 이 쪽 저쪽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만족 할 만큼 부드럽게 만져준다. “샤워시켜 드릴까요?” “.........꺼져.” “안 건드립니다. 절대로.” 내가 하지 말랜다고 안 할 녀석도 아니고, 내가 하라고 할 녀석도 아니다. 나는 거의 반쯤 안기다시피 욕실로 향해서 열이 오른 몸을 겨우 욕조에 담궜다. 머리카락 위로 뚝뚝 떨어지는 적당한 온도의 물기- 그리고 아무 말없이 부드럽게 감겨오는 샴푸의 향. 몽환적인 느낌이 들었다. 습기가 가득한 욕실이라는 공간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나는 겨우 머리 속이 아찔하게 잠기는 듯한 부드러움을 깨뜨리려 애쓴다. 그때서야 제 정신을 깨우듯 간신히 입을 열어 녀석에게 말했다. “누나... ..잘 지내고 있지?“ “..네.” 녀석은 더 이상 없다는 듯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로서는 녀석의 잔혹한 짓에 적당히 감수하는 빌미가 된 일들. 그러나 녀석은 답답할 만큼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네 누나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왔어.” 잠시 머리 카락 속의 손길이 멈춘다. 그리고 훅-하는 짧은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녀석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씁쓸하게 대답한다. “괜찮습니다.” “............” “..선배가 잘못한 건.. 그저 윤은협을 좋아한다는 것 뿐이니깐.“ “하지만...” “..그 날 은협이 선배와 기연이 선배를 둘 다 용서한 건.. 나 역시 기연이 선배처럼 부모님 없이 누나하고만 자라서 그렇습니다. ..........나는 선배 마음을 이해해요. ..누구나 혼자라는 것에 처절하게 길들여지는 사람들은.. 곁에 있는 뭔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니깐...“ 갑자기 그 말이 묘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이 녀석은 정말 속을 알 수 없다.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날 내가 무슨 뜻으로 자신을 찾아갔었는지. 그래, 오히려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감정을 이용해 먹을 줄도 알았다. 은협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나의 안간힘을 이용해 먹는 것이다. 그것을 떠올리자 이상하게 마음이 욱씬거린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것에 희망을 걸 만큼 은협을 사랑하는가..라고 스스로 자문해 본다.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 녀석의 협박에 이제 자진해서 나를 버틸 수 있었던 나는 진작 사라져버렸다. 처음부터 무엇이 나를 그렇게 은협에게 옭아맸을까. 그것은 어쩌면 강서준의 말처럼, ‘그런 윤은협이라서 딱 알맞은 유기연’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길들여왔다. 조금 떨어져서 지낸 이 혹독한 과정이 나에게 그것을 일깨워준다. 갑자기 툭- 뭔가가 내 심장 아래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동안 질끈하게 나를 메어왔던 의무감이었는지 뭐였는지 모르겠다. 그저 욱씬하게 에워쌌고, 나 역시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런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렸는지, 서준이 더욱 부드럽게 손을 놀렸다. 속이 공허하고 기묘한 후회감으로 가득찼다. 만약 허락되었다면 그순간이야 말로 마음 놓고 화내고 싶어질 정도다. 그러고보니 나는 , 윤은협에게는 제대로 화를 낸 적조차 드물었다. “자, 머리 숙이세요.” 녀석이 등 뒤에서 말했다. 잘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순간 생각한다.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이 증오가득한 녀석이..그 찰나에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갑자기 맞닿은 등에서 열기가 솟아난다. 순간, 당혹감이 들 정도로 나는 엉망으로 취하고 싶었다. 술을 못하는 까닭에 정신이 그만큼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 녀석을 알고 있다. 이 녀석을 이용해서 엉망이 되는 방법을 익히 알고 있다. 거품이 몸을 타고 흘러 내려 물 위로 둥둥 떠 다닌다. 나는 불쑥 속을 치고 들어오는 내 몸 안의 남은 열기에 당황했다. 맨 손이 전라의 몸을 아무런 기계적으로 씻기는데도 그렇다. 이미 나라는 존재는 없어진 것같은 기묘한 상실감에 마음이 쓰렸다. 살짝 비틀거리며 녀석의 손길에 일어섰지만, 온 몸에 비누칠을 하는 그 손길에는 속수무책 반응하고 말았다. “..........-!!!!!!!!!!!!!!” 다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아무런 감정없이 몸이 섞이는 이 관계에...그 잔혹한 이기심에 끝내 굴복한 내 생존본능 때문이다. 내가 이런 녀석에게 반응할 리가 없다. 절대 없다. 이 녀석은 나를 협박했고, 거의 억지로 몸을 열게 만들었고.. 더군다나 사내 마저도 안을만한 내 강한 자존심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런 녀석에게 반응할 리가 없다. 이런 녀석과 몸을 섞는게, 단순한 쾌감 이상으로 좋을 리가 없다. 그저 길들여진 몸의 생리현상일 뿐이다. 둘 다 배출 이외의 것이 없는, 그저 파괴하고 공허해지기 위한 관계. 언젠가는 너를 죽인다, 강서준.. 나를 이렇게 만든 너를 .. ..내 손으로 죽인다. 비누를 묻힌 거품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허리에서 엉덩이, 그리고 미끈한 허벅지 안 쪽까지. “........아......................” 그리고 몽롱한 머리와 짙은 피로감, 나 자신에 대한 책망이 속 쓰리게 다른 것을 찾도록 부채질 했다. 사람은 지나치게 고통스러워지면, 그것을 피하기 위해 환상을 본다. 마치, 사막에 버려진 사람들이 신기루를 보듯. “.....안아드릴까요?” 그 순간에 딱- 내 미묘한 상실감을 이해한 것처럼 녀석이 등 뒤에서 말했다. 순간 오싹할 정도의 전율이 다시 등줄기를 파고든다. 나는 그 찰나에 내가 태어나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했다. 바로 약 기운과 감기기운, 그리고 감정의 공허함에서 탈출하고자 안간힘을 쓰며 나는 나 아닌 다른 이의 목을 처음으로 내게 끌어당긴다. 그래, 언젠간 내가 너를 죽인다. 나를 수컷 냄새에 발정하게 만든 댓가로 너를 죽인다. 5. 입을 맞춘다. 그 때까지도 몽롱했다. 팔끝까지 힘이 쫙 빠지는 바람에 겨우 숨을 몰아쉬며 녀석의 어깨에 몸을 기댄다. 그리고 입안을 부유하는 데일 듯한 열기에 압도 당한다. 더..채워...라고 온 몸이 갈망한다. 내게 일어나는 이 상실감을 녀석이 곧 채워주리라는 걸 분명 알고 있다. 나는 미쳤다. “......아읏............” 목이 꺾일 정도로 허리가 튕긴다. 지나치게 뜸을 들이며 내려오는 입술은 갑자기 너무나 온화하다. 그 부드러움이 감질 맛 날만큼 애가 타서 나는 점점 초조해진다. 이런 게 아니잖아, 제길!!!!!!!!!!!!!! 이렇게 부드러울 리가 없잖아!!!!!!!!!!!! 뿌연 유리창- 김이 잔뜩 서린 욕실의 거울로 세면대를 겨우 잡고 뒤돌아선 내가 보인다. 그리고 한 쪽 다리를 들어올린 채 녀석이 삽입해주길 기다리는 내 몸이 보인다. 매끄러운 목에서 어깨까지 입맞추는 등 뒤의 녀석도 보였다. 내 눈으로 확인되는 광경은 희뿌연 습기만큼 자극적이다. 그만큼 나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또한 녀석은 그런 내 마음의 빈 공허함을 노리듯, 치밀하게 따뜻하다.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지금껏 한번도 보여준 일 없는 달콤한 손길로 아래를 쓸어 내렸다. “..으윽.......-!!!” 벌려진 다리 사이로 얼굴을 들이대고, 엉덩이 살을 양쪽으로 벌려서 애널에 혀를 할짝인다. 그 광경이 거울 안으로 똑똑히 보였다. 그 음란한 자극, 그러면서도 왠지 너무나 시간을 들여 애무하는 듯한 정성에 온 몸이 속수무책 달아오른다. 다시, 다시...라고 말하듯 나는 정체 불명의 말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을 조절하기 위해 가까스로 세면대를 꽉 쥐고 버틴다. “으응... ......아읏.......좀 더.......“ 잔뜩 달아오른 내 것은 이미 혈관이 잔뜩 팽창하여 사정의 욕구로 허덕인다. 팔을 뺄 수 없었던 탓에, 나는 몸의 뒤에서 직접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격렬한 자극을 느끼며 세면대 앞으로 몇 번 몸을 쓸었다. 달아오른 내 것을 사정시키기 위한 최후의 방편이다. 그러나 녀석이 그 순간, 손을 재빨리 내밀어 내 것을 꽉 쥔다. 그 바람에 사정의 욕구로 머리 속이 쿵쿵-울리던 나는 기절할 것처럼 소스라치게 비명을 높였다. “.....으윽............-!!!!!!” 안돼...라는 절망감과 내보내야 한다는 초조함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자꾸 본능적으로 흔들리는 내 허리를 감상하며 느긋하게 뒤에서 혀를 놀린다. “.......-!!!!!!!!!!!” 내부까지 속속들이 핥는 듯 뾰족하게 혀를 세워 안 쪽을 빨아 들인다. 그 쾌감이 너무나 강렬해서 나는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녀석은 장난처럼 내 귀두를 몇 번 쓸며, 나머지 한 손으로 가슴의 돌기를 만지작 거린다. 그대로 벌려진 엉덩이 사이에 삽입을 하지 않고 마치 짓궂게 욕을 보이듯 자신의 페니스를 넣고 가벼이 피스톤 질을 한다. 안돼...라고 나는 다시 절망스럽게 물에 젖은 고개를 흔들었다. 거울 속에는 전혀 나 같지 않은 인간이 온통 색기에 젖어 미친 듯이 사내를 탐하는 눈빛으로 애원한다. 미처버리겠다. 정말 나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이 녀석을 지금 당장 갈아마시고 싶었다. 좋을 리가 없다, 내가 이런 녀석을, 이런 행위를 좋아할 리가 없다! 지금만이 오직 허용되었을 뿐이다. 이대로 녀석이 먼저 가버리면, 뒤로도 앞으로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를 찔러주면 정확히 느끼는지 알면서도 얄밉게 삽입하지 않고, 더군다나 내 것을 손으로 막은 채 자신의 뜨거운 열기만 은근히 부추기는 이 행위에 완전히 지쳤을 뿐이다. “..아아아.............” 나는 살짝 목이 갈라진 채, 울먹이듯 부르르 떨었다. 어서, 어서..넣어줘, 넣어줘..라고. 살아 생전 내가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강서준이라는 인간에게 이런 짓을 애원하리라고는 전혀 몰랐다. 그러나 내 머리 속의 이성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애만 닮게 하지 말고 어서 넣어줘..넣어줘, 깊고 가득 채워줘..라는 음탕한 동물만이 다시 허리를 흔들며 신음하게 만들었다. “제발...-!....” 마치 외마디 비명처럼 거의 울음에 가까운 내가 교성을 지르며 몸을 떨자, 녀석의 뜨거운 것이 여전히 입구를 적시듯 그 앞에서만 왔다 갔다 하며 얄밉게 군다. 나는 사정의 욕구로 완전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그런 식으로 달콤하고 짜릿하게 녀석이 반복했기 때문에, 이제는 쾌감이 고통으로 쿵쿵- 심장을 뚫을 듯이 울려댔다. 전혀 녀석같지 않은 감미로운 입맞춤이 돌려진 얼굴 위로 쏟아진다. 눈물이 가득 고여버린 나는 이제 이 상황이 아플 상태까지 몰아붙여졌다. 그 때서야 녀석은 내 벌어진 입구에 반쯤 자신의 것을 끼워 넣으며 혀로 내 귀를 핥는다. “....힛-!!!..............” “...선배....” 정신이 없다. 들어올 듯 들어오지 않고 끝트머리만 넣어진 이 상태가 미칠정도로 안타까웠다. 약이 올라서 눈물이 뚝뚝 흐를 지경이다. 그러나 녀석은 느긋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속삭인다. “좋아요?...” 대답할 수도 없었다. 안절부절하는 초조한 몸을 어떻게든 달래고 싶었을 뿐. 말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고개를 연신 흔들자, 기절할 만큼 쾌감에 잠겨 흐느끼는 내가 불쌍했는지, 녀석이 쑤욱하고 몸을 밀어당긴다. “..아윽-!!!!!!!.........” 좋아..좋아....좋아서 미친걸 같아. 이 순간은. 내부를 마구 휘젓는 이 생생하고 뜨거운 열기. 그리고 몸이 녹아내릴만큼 한번에 압도하는 강렬한 압박감. 나는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마지막에 다급할 정도로 비명이 튀어 나왔고, 뒤쪽에서 턱을 잡아당기며 잡아 먹을 듯 키스하는 입맞춤에 혀를 얽히며. 좋아.., 아아..좋아..라고 마구 녀석을 빨아들인다. 어서 채워. 어서 채워서 식히기나 해..라고 물어뜯을 듯 서로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눈 앞에 하얀 섬광이 터지듯, 뇌수가 흔들리는 환각의 엑스터시가 반복된다. 숨이 꽉 막힐 정도로 짙은 습기와 허기가 동시에 나를 무릎 꿇렸다. 6. 문득, 완전히 녹초가 된 몸으로 팔을 지탱하고 일으키자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정말 나가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이 늦은 시간에 또다시 녀석이 손님처럼 나를 안고 나간다는 것에 갑자기 욱씬- 갈비뼈가 아린다. 항상 이런 식이었으므로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나는 문득 손을 들어, 감기약의 부작용인지 저릿하게 아파오는 가슴 어귀를 가볍게 매만졌다. “푹 쉬세요.” 녀석은 다시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며, 아무 말없이 그렇게만 당부했다. 나는 녀석에게 날카롭게 대답했다. “언젠가는 내 손에 죽어도...” “...............” “우리 사이에 이제 빚은 없는 거다, 강서준.” “.................” “니가 나에게 이런 상처들을 안기고.. 무사하게 앞으로 살아나갈 거라고 기대하지 마.“ 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걸어나가는 하얀 셔츠만 눈에 박힌다. 나는 교묘하고 날카롭게 가슴을 찔러대는 둔통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래도 격렬한 감정들이 엄청난 살기와 색기로 튀어나와 나를 짓누른 게 뻔하다. “..선배.” 그리고 그는 나가기 전에 잠깐 멈췄다. 마치 그 순간에 가슴을 콕콕 -찌르는 내 원인모를 감기 증후군에 대답하듯 말이다. 허나 녀석은 뭔가 말할 듯 주저하다가 곧 혼자 고개를 젖는다. 마침내 결심한 듯 뒤를 돌아보며 침대에 누워 노려보는 내게 말없이 미소지었다. “........-!!!!!!!!!!” 쿵- 하고 마음이 내려 앉는다. 나는 그런 미소를 보지 못했다. 강서준이 저런 웃음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뭔가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내려앉도록 만드는 그런 절절한 웃음. 그 뿐만이 아니었다. 녀석은 갑자기 멈춰 있던 상태에서 한걸음에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손등을 들어올려, 양 쪽 다에 도장을 찍듯 입 맞춘다. 불기가 어린 듯한 뜨거운 흔적- 나는 훅-하고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킨다. 녀석은 아무 말 없이 나의 십자(+)무늬 상처와 짐승의 발톱 자국을 혀로 핥았다.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마치 맹수들이 스스로의 상처를 치료하듯 조용한 태도였다. “............-!!!!!!!!” “..이전부터 특이한 상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 인지 모르겠다. 다시 욱씬- 하고 심장이 아팠다. 감기약의 독한 기운에 묻혀, 과도한 관계를 맺은 게 아무래도 원인인가 싶을 정도다. 녀석은 그저 잠시 얼굴을 바라보더니 여전히 처음보는 그 절절한 깊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일어난다. 처음보는 것은 미소만이 아니다. 그 미소를 만드는 따뜻한 시선- 도무지 설명할 길 없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고, 그 뛰어 오르는 맥박으로 고통스럽기까지 하게 만드는 시선. 한 사람의 눈빛이 다른 한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휘저어 놓았다. “내일..이야기 하죠. ....내일은.. 그래도 선배 쪽에서 기다리는 시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나도 선배에게 할 말이 있거든요.” 갑자기 난데없는 ‘내일’이라는 단어에 숨이 막혔다. ‘내일’이라니..‘내일’이라니!! 우리에게 무슨 ‘내일’이라는 게 있어!!!! 나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런 일은 좀체 없는데, 내 안에서 마구 튀어나오는 색기와 살기- 그 두 가지의 격한 감정이 내 숨통을 스스로 옭아맨다. 심장에 마구 집어넣고 빗장을 걸었던 나 자신. 남은 수년에 걸쳐서 한 일을, 이 녀석은 손쉽게 몇 달만에 내게서 그것을 끄집어 냈다. 용서할 수 없다. 가뜩이나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운 너에게!!!! 나는 온 몸에서 발산하는 독기와 살기를 담아 냉정하게 말했다. “잘난 척 하지마라, 강서준.” “.............” “나는 오늘... 내일이 오기 전에 니가 죽는 꿈을 꿀테니.” 휴우..라고 잠시 녀석의 등이 굳었다. 차가운 말들이 그 하얀 셔츠에 부딪쳐 예리한 파편을 튄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녀석은 마침내 나갔다. 나는 그 때서야, ‘뭐지..방금 그건..?..’이라고 무의식 중에 중얼거린다. 아직도 격렬하게 뛰어 오르는 심장을 움켜쥔다. 감기가 아니라 심장병에 걸린 것 같았다. 더군다나 전에 없이 ‘내일 이야기 하죠’라니.. 그런 일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녀석과 내가 달리 나눌 이야기가 있던가..라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길 정도였다. ‘내일’이라는 단어. 나는 그것을 아주 오랜만에 떠올린 것이다. 아아..‘내일’이라는 게 있구나..이런 관계에-!!! 빌어먹을!!!! 그리고 그 시선과 미소. 그것은 흡사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를 기대하게 만들고 숨막히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잠시간 멍한 채로 계속 욱씬거리는 통증에 나는 숨을 할딱인다. 정신이 든 것은 바로 몇 분 뒤였다. 아아.. 미쳤나보군, 인간 유기연. 저런 녀석에게 뭔가 기대를 하다니. 아니, 설마 자신이 뭔가 기대하고 있다고 착각하다니. 정말 미쳤군. 죽어버려, 강서준. 내 손에 피 묻히기 싫으니, 니가 알아서 죽어버려. 털썩- 침대에 머리를 뉘였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만큼의 열기운과 피로가 동시에 밀려왔다. <짐승의 흔적 - 5> 1. 약속이란 본래 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약속도 기대한 적이 없다. 하룻밤만 지나면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여행을 떠난 엄마 아빠도, 그리고 그 피 끓는 청춘에 의형제를 약속한 또 다른 내 연인 윤은협도. 또한 마치 정부이자 창녀처럼 마음대로 몸을 사고, 점령하고 나를 지배했던 그 날들도. “저를 따라오세요.” 라고 강원우가 말했다. 나는 무려 5일을 혼자 지냈다. 강원우가 틈틈이 들어와 말 상대를 해주고 신문이나 기타 읽을 꺼리들을 가져다 주며 평상시처럼 굴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강서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강서준이 조직을 배신한 것인지, 혹은 죽기라도 한 것인지, 다친 것인지..것도 아니라면 그냥 일에 바쁜 것인지. 죽었다면 나는 춤을 출 것이다. 다쳤다면 나는 노래라도 부르고 덤블링이라도 백번 할 수 있다. 분명히 그렇게 할 것이다. “서준 형님은 바쁘세요, 요새.” 나의 안색을 살피며 뭔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강원우가 조용히 말했다. 굳이 묻지 않았는데, 그만큼 내게 초조한 빛이 나타났나 싶어서 나는 이내 얼굴을 돌렸다. 5일동안 나는 처음으로 녀석에게 들었던 약간의 따뜻하고 절절한 감정. 그런 것들을 잊었다.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노리개처럼 굴다가 이제는 바쁘다는 이유를 말하다니. 문제는 그 뿐이 아니었다. 5일만에 강원우는 들어오자마자 간단하게 식사를 준 뒤, 짐을 챙겼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따라오세요..라고. 그래, 알고 있다. 녀석은 내게 무슨 말이든 ‘내일 하자’라고 말했고, 약속 했다. 약속이란 본래 깨어지기 위해 준비되는 것이다. 2. “이봐요!.....” 모처럼 당황한 나는 갑작스레 외쳤다. 이해할 수 없다. 문득 나를 납치하고 협박했던 그 날처럼 두어달이 지난 지금 나는 짐과 함께 내 아파트 앞에 남겨졌다. 그렇게 보내달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던 이 걸레같은 조직이 갑자기 무슨 아량이 들었던가. 나는 풀려났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았다. 아니, 이런 식으로 이유도 모른 채, 아무런 설명도 듣지 않고 나오는 것도 기가 막힐 지경이다. 그러나 강원우는 여전히 친절하고 또한 뭔가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 강서준이 데려와..라고 턱끝까지 말이 올라왔다가 가라앉는다. 꿀꺽-하고 타들어가는 듯한 침을 삼키며, 나는 강원우를 찢을 듯 노려보았다. 검은 선그라스를 꺼내 들며 그는 자신을 감췄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서준이 형님이 없을 때 보내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 “저도 여기까지가 한계 입니다.” 그 순간에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상대방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호의로 나를 보내주는 것이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피곤하다는 듯 목을 털며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말리려는 듯 손을 뻗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돌아가서는 안된다. 아니, 돌아갈 수가 없다. 지금 돌아가면 나는 녀석을 몇 번이나 잔인하게 죽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강서준도 나를 이용해 먹었을 뿐이고 윤은협은 이기적인 철부지일 뿐이지만.. 그래도 이 인간 강원우는 나를 놓아줄 정도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봐!!........” 창문을 두드렸지만, 그는 냉정하게 출발한다. 믿을 수 없다. 그는 조직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까.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할만큼 내가 위태로워 보였던가. 달칵- 꽤 오랫동안 비워진 집. 그리고 윤은협이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팔아버리지 않은 내 집. 뽀얀 먼지를 손을 쓰다듬으며 나는 들어섰다. 그 두달동안 뭔가에 쓰인 듯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는데.. 돌아왔을 때의 이 참을 수 없는 적막감에 속이 꽉 미어진다. 아니, 한 가지만 분명하다는 생각으로 머리 속이 거칠게 헤어졌다. 그렇다. 정말 강서준은 나를 가지고 놀았다. 윤은협의 빚을 청산한다는 빌미로, 나는 그에게 두어달 동안 성적인 노리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욱씬. 그대로 쇼파에 쓰러질 정도로 나는 아팠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만큼 아팠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아프게 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내가 풀려난 것?..혹은 길들여졌다는 것? 혹은 자존심을 버리고 사내임을 망각하고 엉망이 되었던 것?..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내게 남겨진 것은 그저 섬뜩한 살기 뿐. 나는 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 내 손등을 핥았다. 바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혈관을 찾아, 그 맹수의 손톱자국을 날카롭게 핥는다. 3. 물론 충분히 나는 변해 있었지만 표를 내지 않았다. 오기와 고집, 그리고 기묘하게 속을 가득 채우는 뒤틀린 서글픔- 그것에 이를 꽉 깨물며 일어섰다. 얼굴빛은 여전히 조금 창백했지만, 근 일주일 동안 노력한 끝에 간신히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일주일 쯤 뒤에는 드디어 은협의 사무실에 다시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아아..괜찮아?” 다시 두꺼운 책으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박으며, 은협은 측은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하는 지겹고 지겨운 녀석의 자학증세. 그러나 내일이면 다시 까맣게 잊고 아이처럼 하하 거리며 또 사고를 칠 그런 순수. 아아...물론 괜찮지. 괜찮구 말고. ....그러나 나는 껍데기만 남은 인형같이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원대리, 여기 커피 한잔만 부탁해요-!!” 은협은 은발의 머리카락을 마구 흔들며 마치 악을 쓰듯, 사장실 밖에 있는 사원에게 부탁한다. 내가 이전부터 항상 사무실에 오면 내 손으로 커피를 타 마셨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있는 녀석의 단 한마디 배려다. 나는 커피를 타온 사무실 직원에게 말없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원래부터 그렇게 붙임성이 좋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근간에는 더욱 심해진 것 같다. “괜찮아, 정말?” 커피를 마시자, 머리 속이 조금 개운해 진다. “너...사람 같지가 않아... 이상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지나치게 조용한 나를 의식해서인지, 은협은 쩔쩔매는 듯한 너스레를 떨며 위로하기에 바빴다. 반면, 내 쪽은 점점 차가워지는 의식으로 앞을 그런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공허. 그 씁쓸한 독에 마음이 쓰라렸다. 내게 느껴지는 인간의 감정은 그것 뿐이었다. 나머지는 이상하게도 그 호텔을 나오던 날, 동굴 속에 남겨놓은 것 같다. 역시 떠오른다. 동굴 속에 백일을 갇혀 있으며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었다. 아니, 인형이 되었다. “..저기, 기연아...” 은협은 얼굴까지 시뻘게 진 채, 가만히 손을 모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 안타까운 얼굴에 그제서야 조금, 나에게도 관심의 마음이 떠올랐다. ..아아.. ..떨쳐버리기 힘든 너. “돈은 다 갚은 거냐..그래서?” 나는 말라붙은 입을 커피로 달래며 겨우 묻는다. 그 곳에서 나온 후, 내가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이었다. 내내 궁금했다. 설령 서준이나 그들의 큰형님이라는 작자가 내가 없어진 걸 알았다 한들, 어차피 강원우가 나를 풀어낸 것이고 찾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들이닥칠 인간들이다. 그러나 일주일.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했고, 나는 마치 기억을 조작당한 사람처럼 숨을 가쁘게 내 쉰다. 나는 인형처럼 점점 생기를 잃었다. 이미 그곳에서 정말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충분히 시험당한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내 정신을 빼앗아가고, 뒤에서 흔들어대는 인형처럼 감정은 점점 말라붙었다. 은협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기가 찬 듯 조용히 한숨쉰다. 이쯤 되고 보니 녀석도 이제 자신이 얼마나 막나가는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녀석의 인생을 건져낸 댓가. 그것이 바로 내 혼을 뺏기는 결과였던 것이다. 마침내 은협은 땅이 꺼져라 숨을 몰아쉬며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아니. 돈은 다 갚지 않았어.“ 나는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하..라고 메마르게 웃으며 고개 젖는다. 그래..처음부터 제대로 살았으면 이렇지 않았을 것을. “하지만 그 집을 팔 수 없었어, 유기연!!!” 마치 혼이 빠져 나간 듯한 인형의 날카로운 웃음에 녀석은 붉게 물든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 내 이름을 다 붙여 부를 때는 뭔가 대단히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이다. 그러나 나는 말없이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내가 ‘알겠어.’라고 말하며 차갑게 일어설 때까지 숨을 씩씩거릴 뿐이다. 이제는 너와 이별이다. 윤은협. 우리가 철없이 서로 손등에 칼을 그어 남겼던 혈맹의 의리. 그런 덧없는 우정. 이름뿐인 사랑-그것에 등 돌린다. 등을 돌린다. 누군가가 겁탈해버린 영혼을 찾아야 한다는 결심이 섰을 때, 비로소 나는 제정신이 들었다. “결혼 준비 잘해. 윤은협. 식장에서 도망치지 말고..“ 결혼한다고 했나, 이 녀석.. 그래 할 때도 됐지. 나이도 먹었고..언제까지 내가 너를 돌보거나 등을 지킬 수도 없는 일이지. 알아서 잘 살아봐, 윤은협. .......너 때문에 인생을 갉아먹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게. 이것도 어쩌면 내가 밟고 지나가야할 몫이었겠지. 그 동굴에 갇혀 있으며 백 일동안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이 된다잖아. 그 때였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나에게 성급하게 다가서며 녀석이 휙- 하고 손목을 낚아챈다. “...?.................” 나는 다시한번 표정없이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 잘생긴 입술이 더듬더듬 말하는 의미들은 훨씬 나중에 내게 들려왔다. “그 집을 팔 수 없었어.” 언제나 그렇듯이, 녀석은 악을 쓰고 고집부리는 아이처럼 맑은 눈동자로 서럽게 외쳤다. 이제 그런 것들이 통할리 없는데도 말이다. 이것을 이렇게 길들인 내 잘못인데도 말이다. 내가 못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 녀석은 숨도 쉬지 않고 재빠르게 덧붙였다. “그 집을 팔 수 없었다고!!! 우리에게 남은 건 그거 뿐이니깐! ...내가 결혼하면 들어가 살 집은 거기 뿐이니깐!!!“ “...........??...........”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녀석이 결혼을 하든 말든, 왜 남의 집에 쳐들어와 산단 말인가. 여전히 아무런 느낌도 떠오르지 않자, 갑자기 와락- 녀석이 작지도 않은 내 몸을 끌어 안으며 간신히 입을 연다. 그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혔다. “너랑 하는 거라구, 유기연..” “.........-!!!!!!!!!!” “..겨..결혼까지는 아니지만.. 이젠 정말... 둘이 같이 살고.. 우리끼리만이라도.. 상징적으로 ... 약속도 하고.. 그렇게........너랑 그 집에서...“ “...........-!!!!!!!!!!” 하느님.. ...이 빌어먹을 하늘-!!!!!!!!!! 나는 숨통까지 죄여올 듯, 나를 끌어안은 단단한 팔 안에서 간신히 눈을 떴다. 녀석이 내 손등을 들어 십자무늬 상처에 입 맞췄다. 마음이 욱씬거린다. 이유도 없이 그 행동이 더 아프게 나를 몰아쳤다. 설명할 수 없을만큼 나는 울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나..라는 생각이 나에게는 그 때서야 절실하게 떠오른다. 질끈- 여전히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는 통증. 그 기묘하게 뒤틀린 아픔. 4. 정말이야, 너랑 살고 싶었어. ..라고 은협이 몇 번이나 말했다. 우리들이 처음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칼을 긋듯 그렇게 말이다. 나는 그 때야 말로 할 말을 잃었다. “너랑 살고 싶어서.. 그렇게 성공하려 애썼던 거야. 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우리도 네덜란드 같은 데로 이민가자, 유기연. 거기는 우리같은 사람들도 결혼할 수 있대.“ 철없는 연인. 언제나 순수하게 믿는 눈동자를 굴리며, 어떤 악의도 없이 그저 호기심과 건강한 궁금증으로 타인을 학대하는 철없는 아이.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위해 뭔가 희생했다는 걸 알게되면 이번에는 자신을 자학하며 견딜 수 없고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순수. 은협은 내가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짐들을 옮기며 내게 계속 떠들어댔다. 나는 녀석이 집에 들어오도록 반기지도 않았지만, 거절하지도 않았다. 어느 쪽이든, 나에게는 모두 똑같은 일이었다. “조금 더 기다리려고 했는데... 강서준이 너 데리고 갔다는 말 듣는 순간, 완전히 돌아버렸거든, 내가.“ 녀석은 자신의 많은 책들을 내 책꽂이에 꽂으며 중얼거린다. 주말이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그 모습을 말끔하게 바라보며 나는 아무 생각없이 머리를 쓸어 올린다. 분명히 손 끝에는 감각이 있는데, 머리 속으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다. 갈비뼈 아래는 심장이 사라진 듯, 고요한 혈액만이 부지런히 옮겨 다닌다.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는다. 그 짐승의 흔적들은 나에게서 끈질긴 생명력을 뺏어갔다. “강서준이 .. 뭐, 그 자식도 알고 보니, 사채업자가 시킨대로 너를 끌고 간 거지만.. 그래도 그 날 만나서 담판 지었어.“ 나른하게 앉아서 무신경한 태도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정신이 확 깬다. ‘내일 다시 올게. 선배에게 할 말이 있어.’라는 목소리. 그리고 언젠가 뜨겁게 귀를 축이던 그 습기찬 낮은 속삭임. 머리 속으로 뭔가 쿵쿵- 울리고 지나간다. 방금, 은협이 뭐라고 말했다. 그래, 뭐라고 말했다. 분명히..강서준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 날 만나서 담판 지었다’라고 말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 놀라운 변화에 당황하며 잠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나 나에게 옆모습을 보이며 즐거운 듯, 책을 꽂던 은협은 여전히 뭐라고 뭐라고 떠들어댈 뿐이다. “그 날 말야, 그 날. 내가 널 데리러 가려고, 거길 습격했거든. 친구 녀석들과.. 그래서 마침 큰 형님이랑 마주쳤지. 원래 돈 빌려준 인간 말야.“ “..........-!!!!!!!!!” “알고 보니, 큰 형님이 널 노리고 있더라구.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서로 결판을 내자고 했지. 내 오른 손 약지를 자를 테니, 너를 돌려달라. 잘려진 내 손가락은 돈을 갚겠다는 약속이다..라고..“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서준이 마지막으로 나가던 그 다음 날. 그러니깐, 강서준이라는 그 개새끼가 자기 입으로 ‘내일’이라고 말한 그 날, 은협이 들이닥쳤다는 말이다. 하지만, 은협의 오른손 약지는 건강했다. 어떻게 된 걸까. 윤은협과 강원우, 그리고 강서준.. 셋 중에 나를 순수하게 지켰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나를 위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소리쳤지만 손가락은 죄다 무사한 저 윤은협? 아니면, 실컷 성적인 배출구로 사용하고 두 번 다시 누군가를 안을 수 없게 나를 망가뜨린 강서준? 것도 아니라면..항상 먼 발치 멀어져서 언제나 내가 당하는 꼴을 보면서도, 절대 절명의 순간에 나를 탈출시킨 강원우? 셋 중에 누구!!! 너희들 다 죄다 쓰레기야!!!! 나는 식은땀이 흐르고 갑자기 오한이 드는 듯, 소름이 끼쳤다. 나는 정말 셋다 세상에서 지우고 싶었다. “유기연.” 벌떡 일어서서 부들 부들 떨리는 내게, 갑자기 철없이 덩치 큰 녀석이 우뚝 멈춰선다. 등을 돌린 채로, 내게 표정을 보이지 않은 채 그 녀석은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버리지 마.” “........-!!!!!!!!!!!!!” “그리고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도 마.” 순간, 내 입에서는 ‘억’하는 짧은 신음이 튀어 나왔다. “너를 데리고 오기 위해, 내가 그 큰 형님에게 어떤 댓가를 치뤘는지 알려고 하지도 마.” “.........-!!!!!!!!!!” 나는 그만 다시 털썩 - 주저 앉는다. 철없고 이기적인 아이는, 그 이기심만큼 자신을 위주로만 모든 일을 꾸민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다는 것도 몇 년씩이나 모른 척 하며 위장할 정도로 그는 이기적이다. 자신이 그래야만 내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녀석은 웃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똑똑하게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날 버리지 마.” “................” “강서준은 잊어.” 나는 녀석에게 기만당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녀석이 나를 속인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들은 서로 원하는 만큼만 서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익숙했을 뿐. 그것을 깨듯 강서준이 두 번이나 우리 관계를 밀치고 들어왔던 것이다. 용서하지 못한 쪽은 서준이 아니었다. 윤은협이 강서준을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은협은 서준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십년간 길들어진 모습으로 서로를 속이고, 속아주는 연극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5. 너에게 두 가지 다른 흔적이 있다는 걸 견딜 수 없었어..라고 은협이 말했다. 자신이 남긴 손등의 +자 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남긴 혈흔- 그것을 녀석은 사실 내내 신경썼던 것이다. 난감했다. 나 역시 그랬다. 초조할 때마다, 혹은 긴장할 때마다 그 발톱자국을 혀로 핥는 그 습관.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동했고, 또 그 본능에 스스로 당황했다. 말을 돌리기 위해, 왜 그럼 너는 난잡하게 놀아났냐..,,,라고 묻자, 녀석은 여전히 웃는 철없는 얼굴로 순수하게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맑게 대답했다. ‘그래야, 니가 나를 떠나지 않지. 그래야 니가 점점 더 나에게 빠져들지.‘ 소름이 끼칠 정도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도망갈 수 있는 쪽이 어딘가에 두려워졌다. 강서준을 두려워하던 것은 아주 잠시였지만, 은협은 근 십년 동안 내가 저렇게 키워온 것이다. 나에게는 두 가지 상처가 있는데, 하나는 오른쪽 손등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왼쪽 손등에 자리 잡았다. 하나는 내가 직접 그었고, 나머지 하나는 누군가 나를 향해 낙인으로 남긴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 두 상처 위에는 덧살이 올라오지 않았다. 시간만이 그저 숨죽인 듯 자꾸 흘러갈 뿐이다. 계절이 바뀔만큼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출근할게. 너는 좀 더 쉬어.” 은협은 언제나처럼 맑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내 얼굴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이다. 녀석은 그대로 내게 다가와 손을 잡는다. 그리고는 그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맞닿게 하고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아주 순수한 저 시선. 절대 사람들로 하여금 배신할 수 없게 만드는 바로 저 눈동자. 지독하다. 순수에 사로잡히는 것만큼 지독한 것은 없다. 녀석은 조금 처연하게 웃으며 맑은 눈망울로 호소하듯 말했다. “배신하지 마.” “.................” “날 떠나면.. 널 안 죽여. ...대신 내가 죽어.“ 너 없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라는 작은 주문. 그 말에 가만히 웃어 보인다. 입술 끝이 떨리는 이 웃음은, 그저 언제나처럼 동굴을 빠져 나온 뒤에 내게 달라붙은 인형의 증표다. 녀석은 근본이 착한 놈이다. 아주 눈치가 없지도 않고, 사실은 다 알면서도 눈 감아 주려는 듯 가끔 핏발 선 눈동자로 허공을 노려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출근했다. 우리가 같이 산 지 , 딱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표정을 잃었다. 또한 녀석은 그런 인형같은 나를 안지 않았다. 그렇다고 버리지도 않았다. 다만 계속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집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언제나처럼 기분 좋게 웃는 아이 연극을 계속하며 녀석은 나를 안심시켰다. 너를 떠나지 않아. 그러니 너도 떠나지 마...라는.. 아주 어린 이기심. 물론 나는 딱히 떠날 생각도, 또 딱히 떠날 곳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 주면 이제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이전처럼 프리랜서 비서 일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잠시간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며 커피를 탄다. 아무도 없는 빈 공간- 이제는 점점 타인의 물건에 익숙해진 이 공간을 음미하며 나는 이제 서서히 깨어나는 내 안의 인간을 조용히 품에 안는다. 어쨌든, 끝난 일- 그리고 모든 것은 마침표를 찍었다. 언젠가는 이 빈 껍데기 안으로 환희 가득찬 인간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이때까지 살면서 늘 그랬듯이. <짐승의 흔적 - 5> 1. 다시 출근하고 예전처럼 어떻게든 살아가려 결심한 하루 전이었다. 그 날도 은협은 해맑게 웃으며, 아이처럼 손을 흔들고 출근했다. 남겨진 나는 다시 커피를 타고, 어제 밤 녀석이 TV를 보며 어질러 놓은 자리를 치운다. 거실을 정리하고 나니, 서재가 마음에 걸렸다. 어제 늦도록 은협이 녀석이 쿵탕 거리며 뭔가 들추던 그 서재. 나는 죽은 듯 자고 있었지만, 가끔 예민해진 감각 탓에 흠칫 놀라며 일어나곤 했다. 그 사실을 멍한 아침 머리로 기억해내는 순간, 갑자기 서재가 궁금해졌다. 또 얼마나 어질러놓았나....라고 속쓰리게 중얼거리며 문을 연다. 생각과는 달리, 깨끗하게 정리된 서재였다. 아마 뭔가 찾느라고 어제 밤에는 쿵쿵 거렸던 것 같다. 쓰게 웃으며 나는 잠시 먼지만 닦아낸다. 청소기를 밀고, 잠시 외출해야 겠다..광합성 해야지..라고 속으로 결심하며, 문득 웃었다. 혼자서 웃는 것은 꽤 오랜만이다. 스스로 짓는 미소는 이따금 자신에게 보내는 격려의 의미와 같다. “.........?..............” 그리고 나는 책상을 잠시 걸레로 훔치다 문득, 뭔가를 발견했다. 봉투에 넣어진 무게 나가는 물건이었는데, 만약 겉봉에 쓰여진 것을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겉봉에 쓰여진 이름 하나가 묘하게 내 시선을 끌었다. 두근 두근...아플 정도로 다시 심장이 떨리기 시작한다. 두려움인지 긴장감 때문인지, 혹은 기대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바로 봉투 겉봉에는 ‘강원우’라고만 적혀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 였는지, 은협은 이 봉투 안의 것을 강원우에게 붙이려고 했던 것 같다. 둘 다, 서로에게 악의만 남았을텐데....라고 생각하며 나는 침착하게 그 봉투를 열었다. “..........-!!!!!!!!!!!!!!” 열지 말 것을 그랬다. 마음 속을 펑- 뚫어버리는 뭔가가 갑자기 그 안에서 튀어 나왔다. 안에는 칼같이 뾰족한 뭔가가 스폰지에 쌓인 채 들어 있다. 마치 짐승의 발톱처럼 네 갈퀴가 뾰족한 흉기가 들어 있었다. 부들 부들.. 갑자기 조금 떨리는 손끝으로 나는 조심스레 그것을 잡고 내 손등에 대어 보았다. “.............-!!!!!!!!!!!!” 공교롭게도 내 손등의 상처와 닿아 있었다. 머리 속이, 끓어오르는 강렬한 그 때의 피 냄새처럼 완전히 되살아났다. 나는 살아있었다. 2. 들어서기 전에 잠시 눈을 들어 내가 갇혀 있던 그 호텔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늘 그렇듯, 초조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손등을 들어 그 상처를 혀로 핥는다. 이곳을 떠나온지 한 달하고도 이주일. 나는 70일이 넘게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아니 돌아볼 이유도 없었던 곳으로 들어섰다. 입구에서는 진작에 나를 알아본 몇몇의 녀석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본다. 그러나 처음부터 나는 윗사람들의 명령으로 이곳에 끌려왔고, 그리고 지금은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무리들이 당황해하는 카운터 앞에서 나는 말했다. “강원우 실장 데려와.” 지극히 차갑고 내려앉은 목소리로. 드디어 범인을 찾았다. 내게 이 짐승의 흔적을 남긴 그 때의 인물. 믿을 수 없다. 그것이 강원우라니. 잠시 숨을 돌리고 기다리자, 계단 저 쪽에서 누군가에게 귓속말을 듣던 강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선다. 그 때 헤어졌을 때와 다르지 않게 언제나 조용히 친절한 얼굴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 그는 잘생긴 얼굴에 멋진 웃음을 띄며 내게로 다가왔다. “어쩐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마치, 당신은 올 필요 없다..라는 식의 말에, 나는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종이를 찢어내고 튀어나올 정도로 네 갈퀴달린 그 손모양의 칼을 꺼내 양탄자 바닥에 내던진다. 풀썩- 고운 양탄자가 쇠로 만든 그 흉기의 무게에 잠시 먼지를 털었다. “......................” 강원우는 그 던져진 짐승의 발톱과 내가 얼굴을 향해 들이댄 손등을 번갈아 쳐다본다. 몇 번이나 그렇게 둘러본 그는 분노와 싸늘한 노기로 가득한 내 시선을 보며 한 숨 쉬었다. “이게 왜 윤은협의 손에 들어가 있지?” 강원우는 그 말에 대답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 젖는다. 그러나 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나를 잠시나마 풍요롭게 만들었던 그 때의 기억- 비록 손등에는 짐승에게 할퀸 상처가 남아 있고, 또한 다소 폭력적이었지만 그래도 누군가 나를 지켜주었던 기억. 아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나는 죽어있던 나를 깨우고 용기를 얻으며 두근거려했었다.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았던 내 삶에서 유일하게 누군가에게 구원받은 그 기억. ‘그 상처는 내 것이다.’ ..라고 말한 그 당당한 혈기. 그것이 만약 강원우였다면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속임수다. 내가 잠시나마 환상을 품었던 그 짐승의 추억이 바로 당신이었다면..나는 나의 미련함에 어쩔 줄 모를 정도로 화가 날 것이다. 너는 알고 있다. 내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당신이야?” 대 놓고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내 손등에 상처를 낸 사람이 너냐..라고 물었다. 그 때 나를 도와준 사람이 너냐. 나는 태어나서 한번도 그렇게 무기력함을 느낀 적이 없는데..그 때 그 무기력함에서 나를 구해준 게 정말 너냐? 강원우는 한참 내 눈을 바라보았고, 그리고 물러설 기색없는 그 단단함에 질린 듯 고개 저었다. “잠시만 따라 나오세요.” 그는 간단하게 말하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3. 일단, 강원우는 무사했다. 그래, 나를 구해주고도 이 조직에서 아직 버티고 있다면 그만큼 술수도 강한 작자일 것이다. 나는 그가 확인할 수 있을만큼 건강하다는 것에 안심하며 잠시 노려보았다. 밖의 공기는 이제 많이 쌀쌀해졌다. 그 찌는 듯한 열기- 쏟아내는 뜨거움은 이제 더 이상 시멘트를 달구지 못한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조용한 거리 위에 그와 나는 마주보고 섰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침착하게 둘러보던 강원우는 그 때서야 입을 떼며 말문을 연다. “유기연씨.” “......................” “그 날 저도 있었습니다.” “..........-!!!!!!!!!!” 마침내 듣게 되었다. 그 날 그도 있었다는 말을. 그러나 눈빛을 예리하게 빛내는 내게 고개 저으며 강원우는 지금껏 보지 못한 알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저는 그 날.. 당신을 공격하던 사람들 틈에 있었습니다.“ “............-!!!!!!!!!!!!!” “...모르시겠지만.. 기억 못하시겠지만... 당신을 공격하던 다섯명 중 하나습니다. 비록.. 당신을 보는 순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만.. 그 때부터 이미 당신에게 반해있었습니다.“ “.........-!!!!!!!!!!” 그래, 떠오른다. 다섯명의 녀석들 중 네명만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저 야구방망이를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워낙 정신이 없었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그 때 서 있던 녀석에게 마구 욕설을 던졌었다. 그 사람이 바로 강원우였다. 그 때라면 그가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당시였는데.. “이 조직의 쫄다구 였죠. 그 때 막 들어왔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발톱의 주인이 아니다. 내가 눈꺼풀을 깜박이며 여전히 노려보자, 그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발톱무늬 상처가 남겨진 내 손을 움켜쥔다. “그리고 당신을 이곳에서 탈출 시킨 것도 제가 아닙니다.” “......................!!!!!!” “..몹시 섭섭한 일이지만.. 저 역시 그럴 수 있기를 계속 생각했지만..“ “..............” “...당신에게 남겨진 짐승의 상처. 그 상처의 주인은..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흐릿하던 하늘을 뚫고 천둥이 마구 쳐 오른다. 번개가 번쩍-하고 공간을 갈라놓자, 칼날 같은 비가 마구 쏟아졌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눈을 뜨지도 못할 정도로 폭우가 늦여름을 마지막으로 떠난다. 그 날 남겨진 내 손등의 날카로운 발톱 자국- 그 상처가 새삼 쓰라렸다. 상처 때문에 아팠다. 그래서 생생히 느껴졌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마지막의 생명력들을. 4. 강원우는 빗속에서 조용히 나를 차에 태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 날, 큰형님이 당신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강서준도 , 윤은협도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 “...윤은협이 마지막으로 당신을 데려 가기 위해, 큰 형님 일파들에게 정보를 팔았어요.” 나는 몰랐다. 그리고 비는 지랄같이 계속 내렸다. 차창 밖으로 와이퍼가 움직인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조용히 걷고, 조용히 웃고, 언제나 조용히 남의 등을 지키는 것 같은 그 사내는 마지막 말도 늘 조용히 끝냈다. “윤은협도 아마 고심했을 겁니다. 강서준이 형사라는 것. 이 곳에 위장으로 들어와 몇 년씩 숨어 있는 경찰이라는 걸... 그도 말하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 강서준이.. ..그 개새끼가..형사라구..?.. 세상에.. 조직원이 아니라, 그저 숨어 있던..경찰..?.. 은협이 팔았다는 정보는 바로.. ...‘강서준이 경찰이다’라는 단 한 마디??..그 증거들? 머리 속에 불이 올라 그를 노려보자, 강원우는 여전히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예. 경찰이 맞습니다. 그 사실을 윤은협씨도, 그리고 조직의 큰 형님도 알고 있었습니다. 윤은협씨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습니다. 이미..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요..“ 그렇다. ........윤은협. 그 바보같은 녀석이 실실 웃으며, 그러나 눈동자에는 핏발이 가득 서서 말했다. 내가 너를 빼오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그러니 나를 버리지 마..라고. “하지만, 기연씨. 문제는 은협씨가 그 말을 모두가 있는 곳에서 털어놓았다는 것입니다. 보스는 강서준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또 당신을 노리면서도 기회를 찾고 있었지만.. 당신과 서준 둘 다를 헤칠 마음은 없었습니다. 다만, 강서준을 조직 내에 끌어들여 모종의 다른 계획에 이용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조직 내에는 분열이 조금 있습니다. 보스의 판단과는 상관없는 그런 분열들. 그리고, 그 분열 때문에 계속 히스테리칼 했던 조직원들은, 어떻게든 분노를 해결할 대상을 찾고 있었죠.“ 차가 도착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온 것은 어느 저녁의 병원 앞이었다. 내가 문을 열기 조금 전에 강원우는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 머리 속은 ‘강서준’ = ‘경찰’이라는 해답을 알게 되는 순간, 목이 턱 막힐 만큼 복잡하게 엉켜 들었다. “...그리고 제가 기연씨를 고등학교에 모셔다 들이던 날. 은협이 찾아왔고.. 서준의 정체를 알게 된 보스 반대파의 몇몇 무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그 무리들은 경찰과 인질의 신분으로 부당하게 보스로부터 보호 받고 있는 당신과 서준.. 둘 다를 없앨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로 은협이 찾아왔던 그 다음 날.. 말입니다..“ 탈칵- 왠지 더 들을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표정없이 비 내리는 차 밖으로 문을 열고 나선다. 그러자 서둘러 비속을 뛰어 나오며, 강원우가 우산을 펼쳤다. “기연씨.. 서준이는 오고 싶어도 못 왔을 겁니다.” “..................” “당신이 고등학교에 다녀온 그 비오는 날. 자정이 훨씬 넘어서 강서준은 공격 당했습니다. ..그 이후로 서준이에게 ‘내일’은 없었습니다.“ 가슴 위로 길게 난 상처. 횟칼에 저미듯, 쇄골에서 복부까지 길게 이어지는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출혈이 너무 심해서 모두가 그를 죽었다고 여겼다 했다. 아아... 죽어, 강서준. 죽어!!! 오늘 밤, 나는 니가 죽는 꿈을 꿀거야!!! 마음이 아프다. 갑자기 허리 위부터 ‘지잉-’하고 뭔가가 나를 울렸다. 아냐, 죽어, 강서준!! 너 따위는 일찍 죽어버려!!! 속으로 다시 끈덕지게 저주를 퍼붓자, 또 같은 울컥함이 울려댄다. ‘지잉-’하고 뭔가 날카로운 금속성이 내 속을 할퀴었다. ...그리고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짐승 발톱을 내려다본다. 바로 이렇게 할퀸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너무나 선명하고 예리한 아픔이어서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제 정신을 차리려 애쓴다.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친 새끼-!! 이런 일로 유약한 유기연은 나가 죽어.. 왜 그 녀석을 죽이지 못하는 걸까. 이 독찬 입으로 내뿜는 저주 하나에도, 단지 그런 상상 만으로 눈꺼풀 안 쪽이 뜨거워진다. 아냐, 죽어..강서준. 제발 내 눈앞에 차갑게 나타나... 멈춰버린 내 이성을 일깨우고, 이 고통스러운 저릿함이 사실임을 알려주듯 강원우가 등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기연씨.” “...................” “가서 죽이든 살리든,.. ...양 쪽 다 그 녀석은 말리지 않을 겁니다.“ 겨우 숨이 토해진다. 뻑뻑하게 가슴 안 쪽에 응어리 져 있던 뭔가가 검은 한숨처럼 내 안에서 훅-하고 흘러나왔다. 나는 병실에 들어가기 직전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아무래도 염려된다. 그는 두 번이나 조직을 배신했다. 바로 강서준의 말을 듣고 나를 풀어준 것, 그리고 강서준의 정체를 알면서도 눈 감아준 것. 그러면서 그는 무사할 수 있을까. .. 약간의 염려로 돌아보았을 때, 그는 웃었다. 태어난 이례 늘, 내게는 따뜻한 미소를 보이는 사람처럼. “저는 괜찮습니다.” “...............” “...이보다 심한 짓들을 해도, 또 강서준과 내가 이전처럼 형사와 조직원이라는 관계에서 얼마든지 친하게 지내도....” “..................” “...조직에서는 나를 다치게 못합니다.” “......하지만, 강원우 실장.. ..당신은...........“ “...제가 보스 입니다. 기연씨.” “........!!!!!!!!!!!..........” 나는 정말 몸이 빳빳이 굳었다. 조금 전에 서준의 정체를 들은 것, 그리고 은협이 정확히 언제 찾아왔고, 녀석이 어떤 정보를 팔았고, 그 때문에 서준이 공격당했다는 걸 아는 순간만큼 온 신경이 차르륵- 전기로 충전되었다. 그는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한결같은 미소, 한결같은 눈빛. “제가 당신을 노리고 있던 보스입니다. 유기연씨.” “...............”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었던 그 사람.. 그러니깐.. 당신의 입으로 짐승이라고 말했던 그들의 우두머리 입니다.“ “.........아-!..................” “서준은 나를 케기 위해 조직에 위장침입했지만.. 우리 조직의 베일에 가려진 진짜 보스인 저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가 경찰이라는 걸 알고 이미 알고 있었고..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공격받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조직원들에게, 보스는 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특수한 몇 명만이 보스의 실체가 저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조직이 분열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림자처럼 가려진 보스.. 진짜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언제나 조직원들의 분열을 만들었죠..“ “...아..........” 나는 작게 탄식하고 굳었다. 정말 상상도 못했다. 그런 식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아랫사람처럼 숨어있던 강원우의 실체를. 그는 대단한 사람이다. 가장 부드럽게 웃고, 가장 온화한 눈빛으로 사람을 지켜보지만, 그 뒤에서 어떤 일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 마치 사랑하는 듯, 착각하게 만드는 시선을 보내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저렇게 따뜻한 미소로 얼마든지 심장에 정확히 비수를 꽂을 사람이다. 강원우는 조금은 쓰게 웃으며 가볍게 내 등을 민다. “안녕히 가세요, 기연씨.” “...........................”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속이 쓰리다. 지잉-하고 뭔가가 허리 위를 울렸다. 금속성의 아픔이 진득하게 심장 근육을 찌르며 돌아다녔다. 윤은협의 밀고로 칼을 맞던 날. 강서준은 피를 뿌리며 그 호텔 계단에 쓰러졌다고 했다. 그런 그 녀석이 강원우에게 한 부탁은 딱 한가지였다고 한다. 유기연을 놓아줘....라고. <흔적 . 완결> 1. 나는 병실의 한 쪽에 놓여진 전화를 조용히 들었다. 뭔가 할 말이 잔뜩 있었던 것 같은데, 전혀 입 밖으로 세어 나오진 않았다. 늦저녁의 중환자 실 방문에 간호사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진 않았다. 강원우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내자 곧바로 두고 온 핸드폰이 떠오른다. 아마, 윤은협...그 녀석은 지금 쯤 막 돌아와 내가 없는 아파트를 발견했을 것이다. 강원우의 말마따나, 생각없는 빈 대가리인척하고 살아가는 그 녀석이지만...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녀석은 또 다시 착한 그 눈동자에서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책망할 것이다. 아아..라고 나는 짧게 신음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몇 번의 벨이 울리고 상대방이 저 쪽에서 다급하게 받는 기색이었다. -어디야.- 서로가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 거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말들이 허락되지 않을 때도 있다. 지금와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계속 해서 아파오는 짐승의 흔적에만 집중할 뿐이다. 욱씬거리는 그 발톱 모양의 상처를 똑바로 쏘아보며 나는 수화기를 들고 침묵한다. 숨을 몇 번이나 거칠게 토하며 은협은 전화기 너머로 작게 속삭였다. -돌아올거지?- 목 위로 울컥- 뭔가 치미는 이 기분. 욕설을 퍼붓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 이 기분. - 오늘만 외박이야....?- 나는 그 욱하는 기분 속에서 겨우 대답했다. “...........그래.” 라고. 오늘만 외박이야. 내일이면 다시 돌아갈 거야. 오늘만.. 단 하루만 필요해. ......그것이면 충분할 거야. 달칵. 전화를 끊고 나는 병실에 들어선다. 문 앞 명패에 ‘강서준’이라고 적혀 있었고, 병실 앞에는 경찰 두명이 지키고 있었다. 강원우가 무슨 빽을 써서 이 경찰까지 포섭했는지는 알 수 없다. 끝까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강원우란 인간이다. 따뜻한 시선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 살릴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 뚜뚜..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오실레이터에서 작은 파음을 그리며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조금 전에 내가 끊어버린 전화기 소리와 닿아 있었다. 참, 지독한 녀석들...이라고 중얼거리며 가슴 가득 붕대를 메고 잠들어 있는 서준의 옆에 앉았다. 창 밖으로는 계속 비가 내린다. 처음 이 상처를 입던 날도 그랬다. 어쩌면 작정이라고 하고 노리듯 이 녀석은 그 날 골목에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이 녀석이 처음으로 내 손등에 맹수의 상처를 입힌 날. 그 날은 이미 서준과 그 전에 은협의 일로 진작 만난지 일년이 훨씬 넘었을 때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날로부터도 장장 7년이나 흘렀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녀석을 처음 만나는 것처럼 또 다시 손등이 쓰린다. 말없이 들고 간 발톱 모양의 철제 칼을 내리고, 나는 침대에 엎드렸다. “선배가 그 녀석과 헤어지기를.........” 머리 위로 들리는 갈라진 음성. 가라앉은 채 조금 쉬어 있는 그 목소리.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음성을 잠시만 음미하고 싶었다. 내가 이런 녀석 따위를 좋아할 리가 없다. 당연하다. 그렇게 잔인한 일들을 잔뜩 시켰는데 좋을 리가 없다. ...그러나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저 쪽 끝에서의 목소리. 그 맹수의 목소리에 잠시 전율한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녀석은 마치 중얼거리듯 말했다. “선배가 그 녀석과 헤어지기를... ..얼마나 저주했는지 모릅니다.“ “..................” “....당신의 상처는 모두 내가 가져갔으니깐................” 당신의 상처. 상대방의 이기심에 맹목적으로 희생하고 싶을 정도의 그 통증들. 그것을 이미 모두 내가 가져갔으니깐. “...알고 계시죠?.........” 나는 계속 엎드려 있었다. 만약 이 순간에 고개를 든다면, 나도 모르게 그 따뜻한 음성에 현혹된 눈물이 비췰까봐 겁이 났다. 그러나 녀석은 그런 것 쯤은 이미 단련되어 있다는 듯. 내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 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덧붙였다. “...선배.. 알고 있죠?“ “.............” “...항상 뒤에 있었어요.” “.................” “...그러니깐... 자꾸.. 돌아보지 않아도 돼요. ....그 상처는 처음부터 내 것이니깐.“ 온통 상처로 왜곡된 내 삶 자체를 이미 가져갔으니깐. 마치 그렇게 들린다. 그 말이 너무나 따뜻하고 안심되어서 하마터면 흔들릴 뻔 했다. 그러나 나, 유기연은 그렇게 단순한 인간이 아니다. 그저 엎드린 채, 나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을 뿐. “..........죽어버리지.. 왜 살아났어..강서준...“ 한동안 그 말에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녀석이 말문을 이었다. “.......저에게 앞으로 무사하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셨죠?...........” 그래. 기억난다. 분명히 이 녀석이 사고 당하기 전 날. ......그 목욕을 하던 날, .. 방을 걸어나가는 녀석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니가 무사할 거라 기대하지 마.’라고.. 이제 우리 사이에 서로 진 빚은 없어..라고. 그러나 녀석은 그 질문에 조금 긴 시간이 지난 오늘. 비로소 이렇게 대답을 건넨다. “..처음부터 무사한 적이 없습니다, 선배.” “.................!.........” “..선배를 만나 이후로.. 나는 한번도 내가 무사히 살고 있다고 느껴진 적이 없었어요. 당신은 항상, 저를 위험하게 만들었거든요.. .......항상.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떠올리게 만드는 고통.. ....당신을 매일 생각할 때.. 그 매일 동안, 내 짐승의 본능은 한번도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 “..........나는 당신 때문에 늘 아팠거든요..........................” 끝까지 고개 들지 않았다. 발끝까지 떨리는 심장 소리 때문에 아무런 감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내 손등을 감싸는 녀석의 거친 손바닥을 느낄 뿐. 그리고 아무런 의미없이 이상하게 내 얼굴을 묻은 시트가 축축해지는 기분 뿐. 상처가 드디어 주인을 만났다. 녀석은 언제나 나를 알아볼 수 있게 처음부터 그 흔적을 내게 낙인찍었다. 2. 나는 꿈을 꾸었다. 녀석의 침대에서 얼핏 엎드려 잠든 그 날. 고된 숨소리만큼 아주 먼 기억 속 장면이 꿈에서 리플레이 되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그 날의 열 여덟 내가 꿈속에서는 아직 어렸다. 뽀송 뽀송한 얼굴, 차갑고 냉정한 표정. 학교 뒷 뜰에서 녀석이 나를 죽이기라도 할 듯 마찬가지 어린 모습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리지만 분명히 강렬한 감정을 담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 ..아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겁이 날 만큼 지독한 눈빛이어서 나는 그 나이의 치기대로 냉정하게 말했다. ‘돈이 필요하면 말해. 니 누나에게 얼마든지 보상해 줄게.’ 녀석은 그 오만하고 철없는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 때 뺨에 와 닿던 그 서늘한 공기는 꿈속에서도 생생하다. 나는 짐승의 꿈을 꾸었다. 검은 암흑 사이로 맹렬하게 빛나는 그 두 눈동자! 갑자기 떨리는 입술을 냉정하게 씹으며 나는 더욱 얼음같이 말했다. ‘윤은협은 내 형제이자 친구다. 그 녀석을 위한 거라면 더 한 것도 해 줄 수 있어.‘ ‘..................’ ‘욕을 하려면 나에게 하고, 죽기 직전까지 패고 싶으면 나를 패.’ 그 때야, 녀석은 조금 비웃듯 입술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 새끼가 죽으라면 선배는 죽을 수도 있겠군요.’ 물론, 두 번 주저하지 않고 나는 말했다. ‘당연.’ 어둠속에서 눈이 빛난다. 언제나 사냥감을 쫓는 그 맹수의 두 시선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거칠게 빛났다. 언젠가는 저 날카로운 발톱이 내 심장을 가를 것이다. 그러기 전에 저 녀석을 죽여야지. 없애야지. 그러자 눈물이 났다. 그렇게 강하고 울지 않는 얼음같은 내가 눈시울이 뜨거워져 어쩔 줄 모를 지경이었다. 일그러지는 내 얼굴이 고통을 생생히 느끼게 만들었다. 외마디 절규가 마음 안에서 쏟아진 것이다. 저 녀석을 죽여야지, 죽여야지. 나를 물어뜯기 전에, 어서... 없애야돼. ..없애야... 그러나, 나는 녀석을 소멸시키지 못했다. 아..안돼...라는 단 한마디의 본능적인 절규가 튀어 나온 것이다. 그것은, 흡사 나를 죽이는 것과 같은 무게의 고통이어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꿈이 아닌 듯, 나는 벌떡 깨며 손등이 무척이나 저리다. 무심해 손등을 내려다보자, 야수의 시선이 격렬하게 다가와 그곳을 찍어 누르듯 할퀴었다. 저릿한 통증과 생존을 위해 심장이 마구 뛰어 오른다. 짐승의 흔적이 남았다.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을 흔적이. 악몽같은 그 꿈에서 허덕인다. 누군가가 귓전에 속삭일 때까지 계속 나는 뒤척거리며 신음했다. 그리고 그 때서야 조용한 음성이 내게 말했다. ‘알고 있죠? 나도 몇 번이나 선배를 없애고 싶을만큼 사랑했다는 걸..’ ...라고. ‘모든 상처를 내 탓으로 돌려요. ....그래야 나도 한번쯤 당신이 나를 기억하리라... ..그런, 욕심을 부리죠..‘ ...라고. 비로소, 나는 안심하고 다시 잠들었다. 내일은 은협에게로 돌아가야 겠다. 서준은 여기서 혼자서 버틸 수라도 있지만, 은협이 녀석은 그렇지 못할 녀석이다. 아니, 은협 역시 내가 스스로 만들어 온 덫이다. 그렇다면 해결하지 않고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이전처럼 돌아가야 한다.. 은협은 은협의 자리로, 나는 나의 자리로, 그리고 서준은 서준의 자리로. 그렇게 돌아가 뭔가의 답이 보일 때가 되면..어쩌면 이들 모두를 정말 떠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심지어, 강서준.. 너마저도. 마음은 이렇게 아픈데, 아직도 용서되지 못한 너 마저도. 그 사실을 생각하면 내내 마음이 욱씬거리지만, 겨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 치열한 감정은 그저 한 낱의 꿈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꿈을 꾸는 것이다. 아주 길고 질릴만큼 반복되어온 짐승의 흔적을. 누군가 내 모든 상처를 짊어진 채 뒤에서 기다리는 그 꿈을. 내가 누구와 있던, 그가 나를 기다리던 그 꿈을. 언젠가는 이 짐승의 흔적이 다시 나를 너에게 불러줄 그 꿈을. -end-